♣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옥탑방 여자 / 문정

시인 최주식 2010. 1. 31. 00:13

옥탑방 여자 / 문정

옥탑방 여자가 눈 덮인 골목을 몇 점 오려 널고 있었네
사내는 휠체어에 앉아 2층 옥상을 내려다보았네
그 여자의 빨래건조대를 아파트 3층 발코니로 바짝 끌어 당겼네
교회당 종소리가 얼음처럼 단단한 사내의 바깥공기를
말랑말랑하게 두드려주었네 빨래에는 그 여자의 지난 일주일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네 사내는 여자의 발끝으로 꼭 길 하나
흘려놓고 싶어 가만가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네
좀처럼 꿈쩍하지 않는 발바닥에 바퀴나 깃털을 달고 싶었네
빨래들이 햇살을 물고 금방 피라미 떼처럼 꿈틀거렸네
젖은 수건 한 장이 손을 뻗어 여자의 어깨를 어루만졌네
그 여자의 발끝에서 시가지 쪽으로 하얀 길이 달려나갔네
사내의 지루한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 멀리 있었네
여자의 눈에 쉽게 끌려온 시가지가 여자의 입술에 웃음을
새겨 넣었네 갑자기 빨래 한 장이 긴 줄에서 여자 앞으로
뛰어내렸네 잽싸게 빨래를 집어 들고 뒷덜미에 집게를
물리는 여자의 가슴이 높은음자리표처럼 출렁거렸네
사내는 목을 빨래처럼 길게 쭉 내밀었네 순간 2층 옥상과
3층 발코니 사이에 길이 척 놓였네 사내는 휠체어를
힘껏 앞으로 굴려나갔네 그 여자가 옥탑방 문을 쿵 닫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네 빨래들만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햇살이 사내를 자꾸만 간질였네 눈이 녹아내리는 골목길 위로
두 개의 바퀴자국을 내며 사내는 굴러가고 있었네

 

메추리알 / 문정

 

플라스틱 소쿠리에 메추리알이 몇 개 담겨있다

 

껍데기 얼룩 사이에 울긋불긋 정원을 그려 넣으며
나는 메추리알 하나를 집어들었다
송곳으로 알의 노른자와 흰자를 뽑아내려다가
나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내 엉덩이에 아직도 남아있는 몽고반점이 들썩였다

 

메추리는 알을 층층이 뱃속에 품고
사육장 그물막 바깥으로 지나가던 먹장구름과
짓궂은 저녁 눈보라와 빛깔과
꽃가루 날리는 허공의 향기를 잊지 않으려고
꼭꼭 다짐하듯 둥근 알의 표면에 얼룩을 그려 넣었을까

 

내 엉덩이의 몽고반점 속에서 
벌판을 또각또각 두드려나가는 말발굽소리가 울려나온다
벌판의 풀들이 이파리를 죽 펼쳐 파닥이고
나는 벌판 끝을 풀씨처럼 뚫고 나가 바깥바람을 탄 것 같았는데
내 손이 다시 플라스틱 소쿠리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메추리알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을까?
알록달록한 달이 땅에다가 벌판을 죽죽 그려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