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이 앉았다 가는 자리 / 김륭
땡글땡글 한때는 한여름 수박통보다 잘 익어 힘 꽤나 쓴다는 사내 몇은 아작 났을 거라 이놈저놈 모기떼처럼 앵앵거리던 눈빛 어매, 환장할 거
꼭지 떨어진 엉덩이 용케도 건져 올렸지만 몰랐던 거지 붉은 속살 넘보던 그 눈빛 퉤퉤 수박씨처럼 뱉어내던 시절 먼저 서리를 맞는 거라
멋쩍다, 반백의 할머니
축 처진 한쪽 어깨에 매달린 갈퀴 같은 손, 죽음에게 등을 보이기 싫다는 듯 툭툭 핏줄 불걱거리지만 한줄기 바람마저 더 이상 혀를 박지 않는 노구老軀
복날의 뙤약볕 아래 엉덩방아 찧느니 불쏘시개로 타오르겠다는 듯 끙끙 손자 놈들 품에 안길 수박 한통 사들고 죽을힘 다해 오르는 언덕바지 너머
이 빠진 부엌칼 불끈 움켜쥐고 씨-익 단물 빠진 잇몸이라도 물어내고 싶은 곳
수박이 잠시 앉았다 가는 자리
밤새 희번덕 돌아누울 것 같은 그림자 밑으로 슬그머니 굴러들어간 할머니 엉덩짝이 쩍 갈라지는 자리, 수박이 너무 인간적인 방식으로 멀어지는 자리, 빙 둘러앉은 손자들 맛있게 수박을 먹고 할머니는 잊혀져갈 것이다
수박보다 빨리 수박씨보다 멀리
아주 멀리 뱉어질 것이다
-계간 <문학마당> 2008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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