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 위선환

시인 최주식 2010. 2. 2. 22:05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 위선환


  등성이로 바람이 불자 나무들이 골짜기로 내려오더니 그늘이 깊어진 산자락에 멎었다. 며칠이 더 지나가고 해가 짧게 저물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창이 있는 방에 불을 켤 것이고 갈 곳이 없는 사람은 나무 뒤에 남아서 바람 지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밤에는 별빛이 지상의 모든 둥지에 닿으며 새들은 솜이불처럼 두텁게 잠을 덮는다.


   여러 날을 찬이슬에 젖는다. 무릎을 말리고 앉아서 나는 고요하다. 하늘은 깊고 구름은 아주 멀리까지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무심해져서 나무 꼭대기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가지 아래로 한 잎씩 잎이 지는 것을 바라본다. 내 묵은 머리칼 틈에서 먼지 같은 살비늘이 떨어진다.


  한 사람을 오래 기다린다. 가까이 머물던 사람들이 더러 죽고 어떤 이는 내 손으로 묻었다. 산그늘에다 잎사귀들을 죄다 묻고 나서 고독해진 나무들이 흰 뿌리를 옮기며 강으로 걸어오고, 강바닥에는 물이 돌아오고, 나무들은 강가에 늘어서서 물끄러미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오후가 되어서야 강에 하늘이 비치고 비늘구름이 돋아나서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그들은 돌아다보지 않았다. 강물에다 징검다리를 띄우고, 징검다리 밑에 하늘과 구름과 물그림자를 깔고, 돌팔매가 둥그렇게 그려둔 물무늬도 깔고, 물소리를 재우며 건너가서는 내내 적적해졌다. 강의 이쪽 기슭이 길게 비었다.

  차츰 뒷산 등성이에서 바람이 자고 골짜기를 더듬으며 어둠이 내려오고, 강 건너편에서는 나무들 꼭대기가 한줌씩 검어지더니, 어두워지면서 이내 보이지 아니할, 이제는 캄캄해진 나무들 사이로 한 사람이 몸을 들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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