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삽 / 이종섶
오래 쓰면 쓸수록 뾰족한 그곳이 둥그런 엉덩이처럼 변해가는 삽, 처음부터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삽날은 흙을 갈아엎고 퍼 나르는 동안 닳고 닳아 유순하게 변화되기까지 수없는 세월을 홀로 울며 견뎌야 했다
조금씩 추해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찬물로 세수하는 것도 잠시뿐, 쓰레받기로나 쓰이는 늘그막이 되어서야 위협적인 꼭지 부드럽게 깎여 거름더미라도 한 짐 푸짐하게 퍼주고 싶은 착하디착한 곡선으로 변한 것이다
땅을 파면 팔수록 산봉우리 닮아가고 모래를 뜨면 뜰수록 물의 흐름 배워가는 삽 한 자루의 성실한 노동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싶은 날, 평생 맞서기만 하던 땅위에 서서 일방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사과라도 하듯 자근자근 눌러보는 삽날의 애교
나의 노년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 몇 군데 짚이는 곳을 슬며시 만져보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 남을 찌르며 살아야했던 아픔을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괴로운 밤 땅을 파기 위해 삽질을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땅을 파야했던 삽 한 자루의 수행이 떠오른다
땅은 삽날을 갈아내기 위한 숫돌이었을까 강할수록 부드러운 숫돌을 사용해야 한다며 꼬리뼈의 흔적조차 완전히 없애버린 그곳을 내놓고 다니는 짐승 한 마리, 모든 것을 달관한 자세 하나 얻기 위해 날카로운 송곳니도 사나운 포효도 다 버렸다
키쓰는 무장무장 나리고 / 정명
그럽디다 차말로. 어느 시인의 말맨치로, 함박눈이 오믄 우새시럽게도 이웃집 남자가 그립습디다. 아 금메, 그 남자 첫사랑을 탁해가꼬.
긍게 거시기, 그 삼월도 요러크름 눈이 내렸는디, 밤하늘은 아조아조 꺼매서 눈송이는 메밀꽃맹키 빛나등만. 다방 갈 돈도 없는 우리는 뿌담시 동네를 멫 바쿠나 돌았당께요. 그 머시메가 손목 끌고 간 어느 골목길, 배람박에 뽀짝 붙어가꼬 대뜸 이럽디다. 키쓰해 주까. 오메, 낯바닥이 뜨겁고 심장이 통개통개, 난 그만 쫌더 크먼이라고. 내빼부렀제. 뽀뽀도 아니고 숭허게. 그라고 키쓰가 무신 동냥이간디, 낭만적 사랑과 사회*만 알았어도 그짝을 가만 놔두덜 않제. 나가 먼첨 프렌치 키쓰를 퍼부숴줬을 거인디, 짚이짚이 들척지근허니. 그려도 그렇지. 그 놈은, 바보 겉은 그 놈은, 사랑도 짜잔허게 허락받아 허는가벼어. 영산강 하구언둑에서 암시랑토 안허게 들어가지 말라고 붙잡던 보짱은 거시기였당가. 포도시 짱구이마에 차디찬 뽀뽀를 허고 보듬아준 그 놈, 주머닛돈 오백원으로 포장마차에서 홍합 멀국을 홀짝이고 홀짝이다……. 집 앞 골목꺼정 왔는디, 땡땡 언 내 손을 잡고 애문 눈길만 푹푹 파제낍디다. 워째야쓰까, 솔찬히 커부렀는디, 입태꺼정 지대로 된 키쓰맛을 몰르는 나는, 오늘맹키로 눈이 오는 날이믄 맬겁시 스무 살이 그리워 눈물납디다. 순전히 고놈의 눈 땜시 애간장 녹습디다.
키쓰는 폭설맹키 와야 허는 벱이지라우, 아먼.
시방 못다 한 키쓰맨치로 눈은 나리고
무장무장 눈치 없이 나리고
은상
인어주식회사 / 김정호
그는 불룩 솟은 거대한 도시의 아스팔트 위로 매일같이 출근한다
손가락 뚫린 빨간 코킹장갑을 끼고
눈 내리는 신촌 맥도날드 앞을 지리멸렬하게 헤엄쳐간다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비늘이 너덜너덜해진,
검은 고무 지느러미를 끌고
세상에서 가장 느린 속도란 이런 것이다, 몸소 보여주듯
배 밑에 바퀴를 깔고 두 손을 노 저어 헤엄쳐간다
가끔 배가 고픈 듯 플라스틱 바구니를 손으로 휘휘 저으면
백동전 대신 족보도 없는 기쁘다 구주만 오셨다 가시는 일인 주식회사
그는 젊고 싱싱한 공주가 아니므로, 이곳의 벌이는 시원찮다
펑펑 송이눈은 등가죽 위로 하염없이 쌓이고,
깡총깡총 어린 연인들이 그 옆을 종종거리는,
오늘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는 수초처럼 흔들리고 휘어져도,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듯
두 주먹 쥐고 허리 한번 으샤 일으켜 세워 본다
아득한 해저 단칸방에 두고 온 어린 인어들,
아직은 나에게도 두 팔이 있다야,
두 눈을 끔뻑거려 보는 것인데,
그는 바다가 아닌 암초 위에서 젊음을 탕진했으므로, 그리하여
이 거추장스럽게 불룩 솟은 거대한 암초를 묵묵히 갈아버리겠다는 듯
뿌드득 이를 갈며 매일같이 출근을 한다
그가 지났을 아스팔트 수면 위로 새하얀 송이눈이
밤새 징글벨 징글벨 쌓이고 또 쌓여갔다
동상
회오리 / 김대호
나무의 몸에 회오리가 산다
몸을 잘라야 볼 수 있지만
조룡리의 오백 년 된 은행나무 회오리는
한창 때, 뒷산으로 숨는 동학군을 보았다
대개 연륜이 쌓인 회오리는
행간 좁혀 몸에 바람 드는 것을 막는다
외부의 압력은 한 번 걸러 담는다
고향 촌집 대밭을 휘돌아나가던
수다스런 바람들, 젊을 적 애비를 꼭 빼닮은 장남마냥
바람만 불면 집을 나가는 회오리도 있다
어떤 회오리는 성격을 고쳐 종이가 되었다
등짝 가득 문신을 새겼다
몸이 구겨져도 몸에 박힌 사상은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
잔비 내리는 바람재 숲길
허리를 자르면 회오리가 들어 있는 나무들이 따라온다
회오리의 예언은 안으로 돌린 채
시치미 뚝 떼고 바람에 손만 흔드는 나무들
한 치 앞도 점칠 수 없는 사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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