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 이승하
화장장 화구 앞에 식구들이 둘러선다
바퀴가 움직여 쇠침대가 나온다
관도 염포도 수의도 사라지고
얼굴도 가슴도 손도 발도
사라지고 없다 아, 몸이 없다
발굴된 미라 같지만 수천 년을 견딘 것이 아니다
한 시간 만에 남은 것이라곤
대칭으로 남은 팔과 다리의 뼈
갈비뼈 아래로 둥그런 골반뼈
제일 위쪽에 달랑 놓여 있는
해골바가지로 변한 어머니 얼굴
손…… 파를 쓸거나 고기를 다지거나
도마 칼질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는데
입…… 듣기 싫었던 꾸지람 소리
눈…… 돋보기 속에 담긴 눈웃음
맥주 반잔에 발개지던 양볼……
저 골반뼈 속에는 생애 내내 자궁이
그 자궁에 10개월은 내가 들어 있었을 터
화장터 인부가 빗자루를 들고
쇠로 만든 쓰레받기에 뼈 쓸어 담는다
빗자루 끝에서 분가루같이 하얀 먼지가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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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 속의 어머니>
2007년 2월 19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암세포가 췌장에서 폐로 간으로 전이되어 손쓸 수가 없었다. 향년 77세. 그리 오래 사신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생은 고난으로 점철되었기에 편한 세상으로 가신 것이라고 애써 나 자신을 위로하였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경성여자사범학교에 들어간 재원이었다. 1948년에 행해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 외할아버지는 딸의 학비를 댈 수 없다고 선포하면서 학업을 중단시켰는데, 그때부터 어머니의 고난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1950년 4월 30일에 행해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외할아버지는 서울에 있다가 6·25를 맞이하셨고, 이웃사람의 고발로 북으로 끌려가셨다. 선거자금을 댔다면서 빚을 갚으라고 몰려온 채권자들에게 재산을 다 내준 어머니는 처녀 가장으로서 외할머니와 여섯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교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졸업장은 없었지만 시험을 치러 준교사자격증을 딴 덕분이었다.
궁핍의 정도는 말 그대로 극빈이었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 끼니를 때울 방도가 없는. 서울대 공대와 미대에 들어간 두 남동생의 3학년, 2학년 등록금을 마련해주지 못한 것은 어머니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아르바이트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1950년대였다.
궁핍은 시골 경찰서 경관이었던 남자와의 결혼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남편은 어느 날 경찰복을 벗고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김천중앙초등학교 앞 문방구점 희망사의 문을 연 어머니는 30년 동안 어린 학생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면서 공책과 연필을 팔았다. 처음에는 연탄난로를, 나중에는 석유난로를 피우면서 겨울을 났는데, 겨울마다 동상으로 고생하신 어머니를 기억한다. 저녁이면 다리가 퉁퉁 부어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 신음을 내뱉다 잠자리에 드시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슬하의 세 자식이 어머니의 마음을 편케 해 드렸을까. 장남은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갔지만 사법고시에 도전하지 않고 문학도의 길을 걸어갔다. 장남이 법조인이 되지 않고 문학을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긴 세월을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갔다. 차남인 승하란 놈은 고등학교를 두 달 다니고 집을 뛰쳐나가더니 4년 동안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속을 썩인다. 잠을 못 이루는 병을 얻어 대학교에 입학하고서도 1년을 휴학한 끝에 다니는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골칫덩어리였다. 딸인 막내는 1985년에 병원에 입원한 이후 하루도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않는 환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어머니는 10대 후반까지는 행복했을 것이다. 민족 전체가 식민지의 삶을 살아갔던 시대였으니 성장기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20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고생이란 것을 ‘지지리’ 하다 가셨다. 어머니는 평생토록 몸의 어느 한 곳은 반드시 편찮으셨다. 하지만 아침이면 가게 문을 열고 밤늦게 문을 닫는 삶을 정확히 30년 동안 꾸려갔다.
영구차를 타고 화장터로 가면서 마음의 슬픔, 몸의 아픔이 없는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으니……. 관이 화구 속으로 들어간 이후 시간을 보내면서 화장장의 하늘을 보았다. 처음에는 연기가 꽤 거무튀튀했는데 나중에는 하얀 색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몸을 이루고 있던 살과 수분이 연기로 사라지는 광경은 장엄하였다. 내 손과 팔다리, 가슴도 언젠가 저렇듯 연기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화장은 한 시간 남짓 만에 끝났다.
쇠침대를 끌어냈을 때, 아! 어머니는 내 눈앞에 하얀 뼈만으로 존재해 있었다. 가장 위쪽에 있는 둥근 바가지 하나―바로 해골이었다. 팔뼈와 다리뼈, 그리고 골반뼈를 보았다. 어머니의 팔과 다리는 여염집 여자의 팔다리가 아니었다. 공장노동자 이상으로 굵었다. 나는 장사에 여념 없던 어머니에게서 포근한 모성을 별로 느껴보지 못했다. 하지만 굵은 팔다리는 날씬한 여자의 팔다리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 그 굵은 팔다리는 보이지 않고 하얀 뼈마디만 놓여 있는 것이었다. 태아인 나를 감싸 안고서 보호해주었던 골반뼈는 왜 그리 작게 보이는지…….
화장장의 화부 아저씨는 하루 평균 몇 구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일까. 시종 아무 표정이 없었다. 어머니의 유골은 쇠로 만든 커다란 쓰레받기에 쓸어 담겼다. 분쇄기에 넣고 돌리니 어머니의 뼈가 금방 가루로 변하는 것이었다. 20년 전, 친구 박형희의 유골은 사람이 손으로 빻았는데……. 따뜻한 유골함을 받아 안았다. 함을 꼭 껴안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어머니를 꼭 껴안아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은 날이다.
『문학사상』(200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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