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詩

[2010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인 최주식 2010. 2. 11. 23:38

[2010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르골 / 이 슬

 

나무의 뿌리들이 태엽을 감고 있는 시간

누군가 상자뚜껑을 열듯 소리를 쏟아내는 나무들의 춤

소리가 멎을 때까지 흔들리는 일에 한창이다

울긋불긋 어지러운 현기증을 다 털어낸 자리

나뭇가지를 뛰어 다니며 놀던 수액들은 모두 바람이 된다

앞뒤를 보여주며

숨기는 것 없다는 듯 보여주는 엽록의 투명한 연주가 길다

잎의 사이사이마다 음계가 반짝 거린다

 

새들이 앉았다 간 나무 밑 마다

불안한 노래가 가득 떨어져 있다

뿌리가 감고 있는 것은 깊은 어둠이다

칸칸의 어둠에 앉았다 날아가는 새들

가끔 잎을 털어내는 환한 시간이면 날아오르는 새들이 있다

 

가장 밝았던 한 때

꽃잎의 치어들을 다 허공에 날려 보내고

나무는 지금 푸르게 비어 있다

꽃의 그늘이 진 자리에 초록의 소리가 가득 하다

 

바람의 흔적이 가득한 나무 속

나이테를 돌아 풀어지는 태엽

평생 춤출 곡이 빙빙 돌아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푸른 치마를 입고 거꾸로 서서 흔들리는 듯

바람이 상자를 닫는 시간

음계들이 떨어진 나무 밑에는 그늘도 다 졌다

나선형의 나이테 그 길이만큼 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진<네이버 블로그> '푸우'님

 

 

[당선소감]

 

당선의 무게 큰 성장통 될 것

 

 

  각각의 사람과 사물에게는 그 고유한 시간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에게는 그 고유한 시간의 부피가 부족합니다.

 

  또한 모든 관계에 사이가 있듯, 저는 저와의 시차를 확인하려 스스로 사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너무 어려서 저 다운 것들과 멀리했던 그 사이를 오늘은 끌어당겨 다정하게 팔짱을 기고 싶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응모 결과가 또 다른 시차를 제게 던져 주는군요. 시차 부적응시에 두통과 초조함을 유발하듯 당선이라는 무게는 저에게 부담과 불안함을 유발했습니다. 이것이 성장통의 한 종류라면 꽤 괜찮기도 하고 꽤 잔인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미팅을 주선하듯 시와 만나게 해 주시고 아직 어린 자질을 칭찬해주신, 그러나 여전히 무서운 박해람 선생님! 이제는 제 두려움도 다독거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늘 말씀하신 명분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님, 특히 엄마! 엄마와 함께 시를 공부하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멀리 백일장에 갈 때 운전기사를 자처해주신 아빠! 자만하지 말라시던 그 말씀까지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동생들, 함께 공부하는 경운서당 학동님들.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용인문학 회원님들.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제가 읽었던 모든 시들과 부족한 시를 선택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마음 숙여 감사드립니다.

 

또 한 광주일보사의 선택에 누가 되지 않는 시를 쓰겠습니다. 잊지 못 할 새해가 될 것 같습니다.

 

  

 

[심사평]

 

 

 

비범하고 감각적인 사유 … 신예 출현 기대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들을 유심히 읽었다. 시적인 대상을 나름의 감각과 사유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였으나 아쉬움이 아주 없진 않았다. 단정하고 힘 있는 문장이 드물었고, 대개는 장황했다. 한 편의 시는 생략을 통해 되비추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불가피했다면 그것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임요희씨가 투고한 ‘포장’외 3편의 작품 가운데 ‘포장’을 주목해서 읽었다. “흰 천으로 싼다”는 이 ‘포장’의 의미는 꽤 중의적으로 읽혔다. 존재의 흔적을 없애는 행위, 혹은 철거라는 의미에 상당할 이 상징은 신선했다. 다만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이 작품에 비해 미흡했다.

 

  이문정씨의 ‘장수풍뎅이 우화기’외 5편은 시적인 대상을 내심(內心)으로 끌고 들어가는 인력(引力)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시한 서정의 내용이 대체로 평이했다.

 

  박은영씨의 ‘검버섯’외 2편은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함께 경합을 벌인 작품들이었다. 무엇보다 박씨의 작품은 가만가만 나아가는 시행의 보폭이 신뢰를 갖게 했다. 솔직했고, 과장이 적었다. 작품의 내용이 가계(家系)에 국한된 것들이어서 다른 작품들을 더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끝까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슬씨의 ‘모닥불이 달을 굽는다’외 3편은 첫눈에 들었다. 이슬씨의 작품은 부드럽지만 독특한 상상력을 선보여 위력적이었다. 시적인 대상을 둥글게 감싸는 빛 같은 게 느껴졌다. 대상을 그 외곽에서 한 번 더 감싸는 이 비범하고도 감각적인 사유는 대상에 대한 무궁한 사랑과 뛰어난 통시(洞視)에서 비롯된 것임에 분명하다.

 

  시 쓰는 이로서의 미덕을 천생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 신예의 출현을 각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당부를 드린다. 당선을 축하한다.

 

 

 

이문재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운동’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을 발표하며 등단 ▲1995년 김달진문학상, 1996년·2002년 소월시 문학상, 1999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2005년 지훈문학상, 2007년 노작문학상 등 수상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산문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 ‘이문재 산문집’ 등 다수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창과 교수

 

문태준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處暑’외 아홉 편이 당선돼 등단

 

▲ 2004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2005년 ‘미당문학상’, 2007년 ‘제21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 등 시집 다수 ▲현재 ‘시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