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부산일보 신춘문예 - 단편소설
옷들이 꾸는 꿈 (1)
가게를 가득 메운 옷들이 열대우림 나무처럼 자란다
아빠가 떠나고 내가 떠나면 엄마 옷과 함께 시간을 견딜 것…
1
바람 없는 날이다. 그림자마저도 제 주인에게 바싹 붙어 정오의 더위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태양이 세상을 빛으로 채우면,빛의 포화를 견디지 못한 사물들은 이글거리는 지상 위로 짙푸른 색이나 검은색,혹은 허옇게 마른 색을 뿜어낸다. 여름의 색은 무료하다.
삼십 분째,삐걱거리는 의자 어느 틈에서 새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스팔트로 덮인 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길이다. 엄마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배달 간 엄마는 돌아오는 길에 분명 부식가게에 들렀을 것이다. 요즘 엄마는 홍씨 아줌마와 잘 어울린다. 부식가게 홍씨 아줌마는 줄줄이 낳은 딸들의 생리대 값을 불평하는 우스갯소리로 엄마의 발을 묶어놓았을지 모른다. 양말도 세탁을 맡기는 요즘인데 일회용 생리대가 없었다면 세탁소는 생리대도 빨아냈을 것이다. 그러면 엄마 앞에서 내뱉는 홍씨 아줌마의 생리대 불평은 쑥 들어가겠지.
손님이 없는 시간이라 다행이지만 다리미 보일러가 내뿜는 뜨거운 열기에 몸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다. 선풍기를 켜놓았지만 휘적휘적 돌아가는 날개는 아까부터 따가운 열기만 피부에 걸쳐놓고 있었다. 머리 위로 가게를 가득 메운 옷들은 열대림의 나무들처럼 지상의 열기를 빨아들여 아래로 자라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의 길이와 부피는 나무의 그것처럼 바뀐다. 엄마는 정원사처럼 매일 옷들을 돌보고 관리한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옷장을 정리하고 코트 따위의 겨울 옷을 맡긴다. 엄마는 맡겨진 옷을 빨아 천장에 심어둔다. 천장에 심겨진 옷들은 여름에 가장 길게 자란다. 겨울이 오지 않으면 주인들은 옷을 잊어버리기 쉬웠다. 부지런한 주인들은 옷을 금방 찾아가지만 대부분의 옷들은 여름까지 길게 자라난다. 엄마는 아예 빨리 찾아가는 옷들과 천천히 찾아가는 옷들을 구분지어 걸어놓는다. 가을쯤이나 그보다 훨씬 뒤,천장이 자라는 속도가 시들해지는 겨울이 되어서야 옷들은 열대림을 떠날 수 있다.
횃대에 가득 걸린 옷들이 주는 위압감은 숨을 막히게 한다. 막연한 기다림에 열이 치밀어 다림질하는 작업대에 엎드려버린다. 오른쪽 뺨으로 열선에 달구어진 다림질 판 열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뜨거운 천에서 건조한 수증기 냄새가 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후,지루한 여름이다.
2
'그레이가든'은 계속 '바다는 고인 물인가,흐르는 물인가'라는 말만 반복해서 적어놓고 있다. 십분 전,'시간은 고이지 않아,흘러가야 해'를 외치고서 그는 딴 소리를 적지 않는다. 나는 교내의 독서토론모임 동아리의 회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책 한 편이나 작가 한 명을 선정해서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모임은 방학이 시작되면서 회원 다수가 고향으로 내려가 갖기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인터넷을 통한 모임이었는데 오늘이 그 첫날이었다. 나에게는 채팅방을 만들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지나도 누구 하나 들어오지 않고 있다. 분명 문자메시지로 사이트와 방제,시간 등을 통보했었다. <시간이 고이는 곳-'이끼'>라는 방제를 찾기 힘든 것일까.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그레이가든'이라는 대화명이 대화자 리스트에 등록되었다. 회원인지 알아보려고 사용자 정보를 검색했더니 모두 '비공개'로 설정되어 있었다. 토론회의 회원이 아님은 분명했다. 강제퇴실 버튼을 누르려는데 여백의 창이 주르륵 내려가더니 글이 한 편 올라왔다. 그레이가든이 올린 글이었다. 그것은 초록색 문자가 무늬처럼 새겨진,하나의 직사각형 틀이었다. 그 혹은 그녀는 더 이상의 글을 적지 않았다. 글을 읽어주길 바라는 듯했다. 여백을 채운 초록색 창은 그레이가든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강제퇴실 아이콘에서 손을 거둬들였다.
고여 있던 공기의 흐름이 약간 흔들린다. 엄마가 들어와 빨아놓은 옷가지를 놓는다. 코에 섬유유연제의 향이 훅 끼친다. 엄마가 조용히 모기향을 꺼낸다. 나는 모기향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고 모니터로 고개를 돌린다. 순간,채팅창에는 하얀 여백이 들어찬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오른쪽 참가자 명단에는 내 아이디(ID)만 올려져 있다.
엄마는 오늘 일찍 가게 문을 닫았다. 안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게 셔터가 열리고 이내 닫힌다. 이 밤에 어디를 가는 것일까. 피곤한 표정으로 창을 바라보다 대화명을 바꾼다. 영숙이. 나는 읽다 만 책을 꺼내 읽는다. 여름밤의 습한 공기가 창을 통해 흘러들어온다. 여름의 공기는 미묘한 무게감을 만들면서 피부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만든다. 습한 공기가 만드는,그 시간의 흐름이 조금씩 느려지다 완전히 고여 버리는 곳. 이곳의 밤은 느린 시간이 빨래처럼 착착 접혀 고이고 모인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삼십 분이 지난다.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이미 끝난 상태다. 책을 덮고 채팅방에서 나온다. 컴퓨터 플러그까지 뽑아버리자 방안엔 정적이 감돈다. 그레이가든의 글을 읽을 때부터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라 예감한 정적이 가게를 채운 옷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다. 먹고 있던 버섯모양과자 봉지를 구겨 휴지통에 던져 넣는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모두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3
왕왕왕와앙……. 탈수기 돌아가는 소리에 눈을 뜬다. 방학이 시작되고 집으로 내려온 후부터 매일 탈수기 돌아가는 소리에 잠을 깬다.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눈만 대충 비비고 곧장 가게에 나간다. 드라이 클리닝 세제 특유의 독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민다. 시원하면서도 진한 냄새에 머리가 아찔하다.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 가게로 통하는 문을 연다. 정면에 우뚝 선 거대한 기계가 몸속을 굴리고 있다. 기계 뒤쪽 철창 속으로는 여러 부속들이 서로를 연결시켜 커다란 벨트를 돌린다. 기계 앞면의 동그란 유리문 속으로는 옷들이 서로를 감아 돌아가고 있다. 단추가 깨질까 염려해 씌운 은박지가 휙,유리문을 긁으며 지나간다. 기계는 물 없이 세제만으로 통 속을 굴린다. 하얀 가루세제가 아닌 검은 기름으로 말이다. 시멘트를 발라 바닥에 고정시킨 탈수기는 한쪽 구석에서 기름을 짜내고 있다. 탈수기 모터는 탈수 진동이 땅까지 전달될 만큼 요란한 회전을 만들고 있다. 기계들은 이 가게가 없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인 채 돌아갈 것이다. 아니,이 가게가 사라져도 저 기계들은 어느 곳에든 붙박여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돌아가는 두 개의 기계 사이로 세탁물을 분리하는 엄마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다림판 앞으로 의자를 끌고 가 앉는다.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가게로 나와 멍하니 앉아있는 것은 오랜 습관이다. 엄마가 바쁘게 움직이는 옆에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집을 떠나 자취를 할 때는 밖을 내다봐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방에 우두커니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맞은편으로는 회색 콘크리트 벽만 보일 뿐이었다. 쥐 오줌 자국 같은 얼룩덜룩한 습기를 머금은 돌은 오히려 갑갑함과 불안함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늦은 아침 식사 후,반찬 그릇들을 냉장고에 넣고 있는데 가게로 나오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짧고 무게가 실리지 않은 간결한 목소리다. 가게로 나가자 비닐을 씌운 세 개의 옷이 엄마의 손에 들려있다. 엄마가 배달을 다녀오는 동안 가게를 지켜야 한다. 엄마는 옷마다 달려있던 이름표를 뜯어내 다림판 위로 던지고 길을 나선다. 직사광선에 대항하듯 엄마는 양미간을 잔뜩 찡그린다. 깡마른 체구에 기형적으로 보일 만큼 굵은 팔뚝을 갖고 있는 엄마지만 움직임은 보기보다 빠르다. 엄마의 날렵한 움직임이 뜨거운 대기 속으로 섞인다. 가끔 저렇게 떠나는 엄마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가게 앞으로 나가 엄마가 떠난 곳을 한참 쳐다보곤 한다.
아빠가 죽고 며칠 후,엄마가 잠시 없어진 적이 있었다. 어디를 다녀오던 길이었던가. 추운 겨울,바람이 차갑던 어느 역 광장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가지 말고,꼭 여기서 기다려야 해. 젊은 엄마는 금세 눈앞에서 사라졌다. 눈 위에 피로 쓴 다짐처럼 꼼짝 않고 기다렸다. 사람들에게 걸리고 차여도 엄마가 말한 자리에서 한 걸음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제 엄마밖에 안 남았구나.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누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이도 젊은데 재혼해야지. 딸이야 맘만 독하게 먹으면 할머니한테도 맡길 수 있어.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이 소곤거리며 한 말이 계속 떠올랐다. 다리가 떨렸다. 오줌이 마렵기도 했다. 잠시 후 엄마는 어떻다는 한마디도 없이 내 손을 채가듯 잡고 급한 걸음으로 택시 승강장을 향했다. 그 때 흐른 시간은 오 분 정도였지만 모든 신경이 기억하는 시간은 굉장히 길다. 그 시간이 인생의 한 전환점이 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예감한 것이다. 가끔 엄마가 없는 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다고 몸으로 느끼곤 한다. 장례식 이후로 엄마가 기다리라고 하면 그 자리에 꼼짝 않고 기다렸다. 싫다고 떼를 쓰지 않았다. 기다리는 일에는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게도 곧잘 본다.
다림판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아 책을 펼친다. 조금 전 엄마가 던져놓은 이름표 세 개가 흩어져 있다. 식육점 2층. 젊은 부부가 사는 집이다. 내가 없는 동안 엄마가 배달을 나가면 가게는 누가 보지? 누가 보긴,옷들이 봐야지. 옷을 옷들이 어떻게 지키냐? 그러니까 문 잠그고 다니지. 엄마는 싱거운 말들을 곧잘 했다. 이름표를 보고 있으니 어쩌면 옷들이 집을 본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주인이 올 때까지 서로의 어깨를 겹치고,등허리를 부여잡고 서로 다독여가며 집을 지키는 것. 그런 옷들을 등지고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한다.
전화벨이 울린다. 수첩과 볼펜을 들고 전화기가 있는 마루로 향한다. 여보세……. 말을 끝내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린다. 종종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당황한 사람들이 전화를 끊는 경우가 있다. 벨이 다시 울린다. 세탁솝니다,하고 엄마의 무덤덤한 목소리를 따라한다. 여보세요? 아,그. 뭐야,거기,주인 없습니까? 시끄러운 곳이나 먼 곳에서 거는 듯 과장되게 높인 목소리다. 낱말마다 간격을 둔 끊긴 발음들이 내 귀를 따갑게 찌른다. 배달 때문에 나갔습니다. 오 분이면 돌아올 텐데요,라고 나는 대답한다. 손님인지,장난전환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배달 때문에 전화하신 건가요 하고 묻는다. 아니,그,에이,나중에 전화할게요. 남자는 중얼거리듯 대답하고는 딸깍 전화를 끊어버린다. 남자의 일방적이고 거친 목소리에 기분이 상한 나는 쾅,소리가 나도록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급하게 뛰어 들어온다. 짧은 팬츠를 입은 여자는 옷을 던지듯 내려놓고 달려 나간다. 순식간에 사라진 여자는 이름표에 쓸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주인을 모르는 옷이 나를 더욱 화나게 만든다. 여자가 놓고 간 옷은 굉장히 짧은 길이의 검은 치마다. 여자가 사라진 길 저편을 내다본다. 여자는 보이지 않고 대신 세탁물을 수거해서 들고 오는 엄마가 사막의 신기루처럼 보인다. 신경질이 단박에 가라앉는다. 엄마는 팬츠여인이 던지고 간 옷이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아맞힐 것이다. 한 번 들어왔던 옷들은 계속 들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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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가든의 이야기>
―삼십 도를 훨씬 웃도는 날씨 속에 그는 방안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더위는 약간의 두통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가며 놀이에 열중한 뒤였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여자들은 지금도 거리를 쏘다니고 있을 것이다. 잠과 잠 사이의 나른한 의식 속에서 문득,그는 방안이 그가 체감하는 공간보다 확장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떴을 때 그의 방은 비어 있었다. 자기가 누워 있는 침대를 제외하고 가구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거기다 문도,창문도,모두 닫혀 있었다.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은,싸구려 여관의 낯선 방에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여관방엔 여자와 함께일 테니 차라리 그쪽이 훨씬 나을 것도 같았다. 두통이 심해져 왔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이 너무 무거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방문을 활짝 열고 거실로 나가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몸을 눕히고 싶었다. 욕실로 달려가 머리에 찬물을 끼얹고 싶었다. 아니,두통약 한 알만 먹어도 좋을 듯했다.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건조해진 눈알이 모래 위에 굴러가는 듯 쓰라렸다. ……! 그가 발끝을 쳐다봤을 때 그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키가 작아 침대 끝까지 닿지 않던 자신의 발이 침대 저 끝 모서리 아래까지 축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그는 그의 배 위로 걸쳐져 있는 기다란 분홍색 덩어리가 자신의 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눈알을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의 팔이 늘어날 대로 늘어나 방의 저쪽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저쪽 끝엔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손이 끈적끈적하게 방바닥 위로 퍼져 있어 끔찍했다. 그는,녹아버린 것이다. 그는 눈을 계속 감았다 떴지만 꿈은 아니었다. 꿈이라면,아주 지독히 긴 꿈이리라.
방의 지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손끝을 바라봤다. 자신의 손이 물건처럼 저쪽에 버려져 있었다. 언젠가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 가 본 동물원이 떠올랐다. 자신의 몸이 동물원 철창 안쪽에서 비를 맞으며 먹이를 먹는,작은 칸막이 우리에서 잠을 자는,더러운 동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몹시도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나타나면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든 해결되리라. 시간은 어딘가에서 멈췄는지 도통 흐르지 않았다. 드디어 어머니가 들어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놀라우리 만치 무덤덤했다. 꼭 그렇게 되리란 것을 예상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를 한 번 둘러보고는 나가버렸다. 그는 순간,겁이 났다. 어머니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다림의 공포가 극심해질 때쯤 어머니는 다시 그를 찾아왔다.
그녀는,꽃무늬가 프린트된 앞치마를 입고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100리터는 족히 될 끔찍한 쓰레기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녹을 대로 녹아 싸구려 딸기 아이스크림처럼 온몸이 푹 퍼져 있었다. 엄마가 열어놓은 방문으로 들어온 파리가 끈적거리는 그의 피부에 엉겨 붙어 그는 아주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의 혀를 돌돌 말아 입안으로 구겨 넣었다. 아주 신속하고 거침없는 손놀림이었다. 다리와 팔도 혀처럼 굴려 배에 꾹꾹 눌러 붙였다. 그는 축구공처럼 둥글게 말려버렸다. 그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어머니는 쓰레기봉투를 침대 턱에 걸치고 그를 굴려 봉투에 넣어버렸다. 쿵!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냉동실 안이었다. 그것도 희미한 냄새로 추측했을 뿐,캄캄한 어둠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았다. 온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갑갑한 그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다시는 밖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봉투 입구만 조금 열릴 뿐 소용없는 짓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자신의 퍼진 피부가 가장 먼저 얼게 될 것이다. 뇌수도 얼고 심장도 곧 얼겠지. 그는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아니,죽지도 못한다. 얼어붙은 몸은 썩지도 않을 것이다. 몇 백 년,몇 천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왜 이런 곳에 갇히게 된 것일까. 일그러진 눈물샘에서 눈물이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짭조름한 눈물은 흐물흐물한 그의 살덩이 위로 흉터 같은 길을 만들어갔다. 흉터 길을 만들던 눈물은 곧 소금처럼 얼어붙었고 그 소금길 위로 새로운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때였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그는 숨죽여 움직이는 물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기다렸다. 반짝,무언가 흔들렸다. 툭. 툭. 봉투 속으로 몇 개의 빛이 떨어졌다. 빛 하나가 그의 세 번째 발가락을 간질였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구석에 처박힌 비닐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꾸물꾸물 모여들었다. 휙 지나가듯,찰나에 보이는 그 빛들은 마른 멸치였다. 그의 발가락 사이로,머리카락 사이로 그들은 헤엄쳐 들어왔다. 수십 마리의 멸치들이 모여 그를 환하게 밝혔다. 멸치들은 그의 몸속에서 생기를 얻었다. 등을 청색으로 배를 은백색으로 바꾸어 펄떡거리며,그의 피부를 흔들어댔다. 찰랑! 물소리가 난 듯도 했다. 그는 곧 바다가 되었다.
5
저녁을 먹고 나면 컴퓨터를 켜고 그레이가든과 대화를 나눈다. 채팅방에 들어서면 언제나 그레이가든의 초대장이 뜬다. 그 혹은 그녀와 어릴 적 이야기나 오해에 관한 이야기,매일 시시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독서토론회 모임에는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첫 모임이 무산된 다음날,한 선배에게 전화를 했을 때 모임이 취소된 걸 모르고 있었냐는 반문을 들어야 했다. 전혀 들은 바가 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도 연락을 해오는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연락하기를 관뒀다.
그레이가든은 자신이 올린 초록색 글을 읽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인지,어느 잡지에서 읽은 글인지,꿈에서 본 것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어느 날 머릿속의 것을 글로 옮기니 그런 이야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멘트 발린 마당을 상상하면 돼.
그는 자신의 대화명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사용하지 않는 훌라후프와 한쪽으로 쓸려 닳아버린 빗자루가 세워져 있는 건조한 마당 바닥. 그곳의 실핏줄처럼 갈라진 금,그 틈으로 개미가 집을 짓고 음식을 나르는,조용한 마당. 오랜 세월이 흘러 바람에 실려 날아왔거나 개미들의 식량으로 운반된 씨앗 하나가 싹을 틔운,연한 초록잎이 훈장처럼 피어나는 마당. 그게 그레이가든이야. 그레이가든은,연한 초록잎이 자라나 더 많은 가지를 만들고 그 가지가 꽃을 피워 풀냄새가 가득한 마당이 만들어지길 기다리지.
―며칠 전에 말이야.
갑자기 생각난 듯,말을 꺼낸다. 비가 삼일이나 연이어 내리다가 막 그치던 날이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환한 해를 볼 수 있었다. 뒷마당을 서성이며 긴 통화를 했다. 통화를 나눈 사람은 토론회 모임의 여자 선배였다. 신입생 환영식에서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습관처럼 왼쪽 손가락의 손톱들을 물어뜯고 있었다. 토론회 채팅이 무산되고 며칠 후,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며 뒷마당에 세워둔 밀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게 청소를 할 때 쓰던 것이었는데 새것을 산 후론 그렇게 뒷마당에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연관 없는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끄집어내 쉬지 않고 주절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고 이야기의 속도도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작아 혹시 혼자 중얼거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녀가 말하는 중간마다 여보세요,하고 그녀를 불러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하고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이렇게 의미 없는 긴 통화를 원하곤 했다. 그녀의 일방적인 대화는 계속됐고,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잠꼬대 같은 흐느낌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언니,생리중이라면 아스피린이라도
[2007 신춘문예 - 단편소설] 옷들이 꾸는 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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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인호기자 nogari@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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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 먹고 자는 게 어때요,라고 말한 것은 통화 시간 사십 분을 넘기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옆집으로 난 담벼락에 기대앉아 줄을 지어 가는 개미들을 손가락으로 흩트려 훼방하고 있었다. 그녀가 혼곤한 잠 속에서 헤매듯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오래 됐다고. 아니,아까 내가 말 안 했었나? 그녀는 자신조차도 정리하지 못하는 말들을 계속 쏟아냈다.
그때 우연히 풀 한 포기를 발견했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밀대의 가느다란 걸레 틈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걸레 틈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가느다란 줄기가 밀어올린 연둣빛 떡잎이 막 펼쳐지고 있는,줄기만 길게 자란 새싹이었다. 오로지 얇은 걸레의 천을 지지대로 삼아,습기를 빨아올리며 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작은 풀을 쑥 들어 올려 버렸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하얀 뿌리가 너무 쉽게 들려서 나는 조금 놀랐어.
그때 가느다란 줄기가 바람에 마구 흔들렸다. 비가 온 뒤라 바람은 얼굴에 습기를 가득 묻히고 있었다. 그 가느다란 식물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화기에서 들리는 기계음을 듣고서야 한참 전에 통화가 끊긴 것을 알게 되었다.
―화분에 옮겨 심어봤지만 그 풀은 곧 죽어버렸어.
그레이가든은 이마를 긁적이는 이모티콘을 그린다. 그래,아무런 말도 못해주는 이야기다. 그저 표정만 나올 수 있을 뿐이다. 아니다. 이것이 그의 표정이 될 수 있을까.
―영숙이는 본인 이름인가? 영숙이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이름이지.
그레이가든이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이름,영숙.
어렴풋이 가게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계는 자정을 넘어 한 시를 가리키고 있다. 급한 일이 생겨 옷을 꼭 좀 찾아가야겠다는 손님 전화일 것이다. 가게로 통하는 복도를 나가고 있는데 벨소리가 뚝 끊긴다. 안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등을 돌리자 엄마가 문을 열고 나오던 자세로 나에게 전화를 받았냐는 듯한 표정을 보인다. 자고 있다가 들린 벨소리에 급하게 일어난 눈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엄마의 표정은 비현실적으로 투명해 보인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는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바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엄마의 영양크림 향이 코를 찌른다. 등을 돌리자 엄마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문틈에서 새어나오듯 들린다. 전화통화를 할 때의 엄마 목소리는 이렇게 작지 않다. 크림의 비릿한 잔향이 코끝에서 맴돈다.
키보드에 손을 올려 영숙 씨가 새 화장품을 샀나 봐,라고 쓴다. 그레이가든의 초록색 글씨가 뜨질 않는다. 엔터 키를 누를 때마다 대화 상대가 지정되어 있지 않습니다,라는 깨진 듯한 작은 글씨들만 계속 뜬다. 요즘 대화들은 너무 일방적이야. 입술을 깨물면서 중얼거린다.
6
방학의 절반이 지나가는 지금도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방학이 시작되고 나서 외출한 적도 없다. 여러 권의 책읽기와 두서없는 일상과 짧은 낮잠 속으로 상상이나 공상들이 머물다 간 일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엄마는 딸에게 학비를 벌어 오라거나 자격증을 따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특별한 요구도 없고 특별한 부탁도 없다. 그것이 불안하게 만든다. 다른 모녀와 다르게 우리는 대화가 적고 살가운 애정표현도 거의 없다.
어쩌면 가게를 보는 것이 엄마가 가장 원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먼 거리의 배달이 있을 때면 내가 가겠노라고 말을 하지만 엄마는 그저 가게만 보라고 말할 뿐이다. 푹푹 찌는 가게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책을 읽고 전화를 받고 손님의 요구를 수첩에 적는 게 내 일이 되어버렸다. 간혹 언제까지 찾아갈 것인지 묻는 것을 잊기도 하고,옷 주인 이름을 바꿔 적은 적이 있고,끊어버리는 전화를 여러 번 받기도 했다. 엄마는 동네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세탁물을 수거하고 배달한다. 엄마의 팔은 햇빛에 그을려 더욱 굵어져 간다.
엄마는 지금도 배달 중이다. 나는 엄마가 없는 빈 가게를 지킨다. 아니,옷들과 시간을 보낸다. 엄마의 배달 간격은 줄어들고,배달 시간이 점점 늘어나 낮 시간의 대부분을 가게에서 보낸다.
세탁소에는 수많은 옷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어느 백화점 할인기간에 산 옷이,명품 옷이,지난해 여가수가 유행시킨 옷이 주인마다의 사연을 달고 천장 깊숙이 걸려있다. 옷들은 주인의 이름이나 집 주소를 달고서 주인이 찾으러 올 때까지 시간을 견디고 있다. 어릴 적엔 천장에 걸린 옷들을 올려보면서 이 옷들 모두 다 찾아가면 우리 집도 부자가 되겠거니 하고 뿌듯해하곤 했다. 하지만 많은 주인들이 한꺼번에 옷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음식 떨어뜨린 자국이나,피,페인트,정액,잉크,화장품 등 동일한 '때'를 입고 들어온 옷들 중 다수는 먼지만 뒤집어쓰고 버려졌다. 규정된 보관기간은 한 달이었지만 엄마는 빈자리가 없어질 때까지 주인을 기다려주었다. 옷을 정리하는 날은 어느 왕의 무덤을 발굴하는 엄숙함과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는 소란함이 있었다. 하지만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바닥에 내려 툭툭 털고 보면 그것들은 유행에서 너무나 지난 먼지뿐인 쓰레기였다. 쓰레기들은 봉투에 담겨 가게 밖에 버려진다. 그것들은 대부분 쓰레기처리장으로 가지만,운 좋게 새로운 주인의 손에 들려가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 집은 그래서,아직 부자가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엄마를 벌써 떠났지만 엄마는 아직도 남의 옷을 떠나지 못한다.
가게를 보고 있으면 간혹 예쁜 옷들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런 옷들은 금방 찾아가 버리는 옷들이다. 아까부터 나는 곧 찾아갈 옷만 모아둔 횃대에 걸린 모시옷에 시선을 뺏긴다. 모시 천 여러 조각을 잇대어 만든 그것은 풍성한 치마를 가진 개량한복이다. 베이지색 짧은 소매 상의는 허리 라인이 살짝 들어가 있고,채도를 달리 한 회색 조각들로 만든 치마는 풍성하면서도 길다.
한복은 풀을 먹여 뻣뻣하다. 이런 옷은 스팀다리미로 다리기가 힘들다. 엄마는 냉동실에서 살짝 얼려 다리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까슬까슬한 천을 손으로 비벼보다 이름표를 찾아본다. 옷에는 이름표가 붙어있지 않다.
7
홍씨 아줌마의 큰 소리가 복도를 지나 방안까지 들린다. 엄마는 다림질을 하며 홍씨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눈다. 컴퓨터 모니터를 켜두고 그레이가든을 기다린다. 세 시간이나 기다려도 그레이가든은 오지 않는다. 내가 접속해 있으면 항상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는 모든 정보를 비공개로 해놓아서 찾기가 어렵다.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수첩을 들고 가게로 나간다. 가게에는 홍씨 아줌마 말고도 손님이 한 명 더 있다. 그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을 가진 중년의 남자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인사를 해야 되는지,그냥 스쳐 지나도 되는 가게 손님인지 몰라 엄마의 눈치를 본다. 남자는 다른 손님처럼 옷 따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주름진 눈을 끔벅이며 내 얼굴을 뜯어볼 뿐이다.
좀 나갔다 올게. 배달을 나갈 때는 나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굳이 외출을 알리는 엄마가 낯설다. 밥은? 말을 하고 나서 내 말이 엄마의 말보다 더 낯설다고 느낀다. 점심은 항상 알아서 먹었다. 엄마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점심을 먹고 올 테니 가게를 보라는 말을 한다. 밥 사먹으라고 돈을 놓고 엄마는 가게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중년의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그의 목소리를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주인을 기다리는 옷들과 함께 엄마가 올 때까지 가게를 봐야 한다. 몇 백 년,몇 천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계속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엄마를 기다린다.
나는 손님을 기다린다.
나는 옷들을 기다리고 옷들과 기다린다. 기다림의 반복이라니. 치가 떨린다.
방으로 돌아와 버린다. 여전히 모니터에는 그레이가든이라는 대화명이 보이지 않는다. 컴퓨터를 끄고 가게로 나와 작업대 앞에 앉는다. 비가 올 것처럼 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다. 소나기라도 내릴 참인지 구름은 빠르게 움직인다. 그래,비라도 확 쏟아져라. 수증기 얼룩으로 뿌옇게 때가 낀 통유리 너머로 하늘을 쳐다보다 전화기를 든다. 그날 선배와의 대화 이후 다시 통화를 해본 적이 없다. 아니,시도는 해봤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휴학을 오래 했었고,그래서 주변에 친해질 친구가 몇 없었다. 군대를 갔다 온 남자동기들이야 있었지만 그녀는 그들과 어울릴 정도로 털털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다 내가 입학했고,내 동기가 몇 명 되지 않아서 그녀와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녀는 항상 불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변덕이 심했고,신경이 예민해서 무슨 일이든 조금만 뒤틀려도 설사를 하거나 두통을 앓았다. 생리통으로 하루씩 결석을 하기도 했다. 이럴 때 내가 하는 일이란 아주 단순했다. 그녀 옆에 있다가 진통제를 내밀거나 콜택시를 불러주면 되는 것이다. 어떨 때는 그녀의 수다를 가만히 들어주기도 한다.
선배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화를 끊고 작업대에 책을 펼쳐놓는다. 오늘 밥은 무얼 먹나,중얼거려 보지만 이렇게 고민만 하다가 한 끼를 건너뛰게 될 것이다. 학교에서 내가 없을 때 선배도 항상 밥을 걸렀다. 방학 동안에는 고향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라고 해도 그녀는 한사코 거절했다. 끝내 비는 오지 않는다. 무더운 하루가 또 지나간다.
8
대형 할인마트 물품보관함에서 영아가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모 할인마트 물품보관함에서 태어난 지 3~4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지역신문 사회면의 하단에 조그맣게 나있는 기사를 읽고 있을 때,전화벨이 울렸다. 여기 식육점 2층인데요,옷 좀 가져다주세요. 신경질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메모지에 주문사항을 적고 전화를 끊는다.
사람 없는 거리에 매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소리는 점점 커져 매미를 귓속에 넣어 둔 것처럼 귀와 머리를 왕왕 울려댄다. 탈수기처럼 온몸을 흔들게 만드는 소리다. 엄마는 오랫동안 돌아오질 않고 있다. 아름다운 그 모시옷을 들고 나가서는 소식이 없다. 엄마가 배달 나갈 때 뜯어두고 가는 이름표를 찾으려고 작업대 위를 살핀다. 한참 뒤에야 그 옷에는 이름표가 없었다는 것이 생각난다.
며칠째 선배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고 있다. 혼자 자취를 하는 그녀는 가족과 섞이지 않으려 했다. 집에 가도 반기는 사람이 없어. 오히려 불편해할 뿐이야. 그래서 그들과 연락하지 않지. 빈 방에 누워 가족들을 기다리는 것보다 자취방에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 때마다 전화기를 들었지만 통화 연결에는 항상 실패했다.
수능을 준비하면서 집을 떠나 먼 곳에 있는 학교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는 옷들과 엄마를 기다리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항상 엄마를 찾고,기다리는 것이 참을 수가 없어진 나는 기다림이 없는 곳으로 가길 원했다. 집을 떠나고 혼자가 되자 나를 기다리는 엄마의 꿈을 꿨다. 선배는 자취방에 혼자 남아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나처럼 가족의 꿈을 꾸고 있을까.
9
일요일은 가게 문을 닫는 날이다. 엄마는 이른 아침친구들 모임이 있다며 서둘러 나갔다. 초록잎이 피어나는 시멘트 마당,그레이가든은 여전히 접속하지 않고 있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게 책을 읽고 낮잠을 잤다. 창문 밖이 컴컴하다. 시계가 벌써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다. 엄마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보고 있던 텔레비전을 끄고 가게로 나간다. 자동차의 빛이 가게 유리문들을 반사시키며 지나간다.
가게 뒤편,잘 찾아가지 않는 옷을 걸어놓는 줄에 모시 한복이 걸려있다. 엄마가 나가고 없던 낮에 의상실 여자가 가지고 왔다. 모시 한복은 엄마의 것이었다. 의상실 여자는 기성복으로 제작된 모시옷을 엄마의 몸에 맞춰 줄인 듯했다. 선물로 받은 건지 천도 버리지 말고 꼭 가져다 달라고 하던데,딸이 해준 거예요? 비싼 건데. 여자는 잘라놓은 천을 챙겨주었다. 그 중년의 남자를 다시 떠올렸다.
대학을 가기 위해 집을 떠나고,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엄마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항상 눈앞에 떠올랐다. 아빠가 떠나고,내가 떠나면서 엄마는 천장에 걸린 저 많은 옷들과 함께 가게에 걸려 시간을 견디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도 나처럼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어딘가로 나가거나,돌아오는.
엄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그래서 손님을 기다렸다.
옷들을 기다리고 옷들과 기다렸다,나를.
엄마가 당연히 내 옆에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피식,웃음이 났다.
낮 동안 끓어올랐던 열기가 밤이 되어도 쉽게 식지 않는다. 다림질 작업대에 엎드려 본다. 작업대의 열기는 식었지만 수증기 냄새가 아직 남아있어 더운 습기가 얼굴에 붙는다. 자동차들이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가게가 환하게 밝아온다. 어두운 곳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 때문에 눈가로 졸음이 몰려온다. 등 뒤로부터 미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눈을 감는다. 툭. 툭. 자동차가 지나는 빛에 등 뒤의 무언가가 흔들려 뒤를 돌아본다. 가게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동차의 빛이 휙,지나갔다. 그때마다 천장에 걸린 옷들을 싸고 있는 비닐에 자동차 빛이 반사되었다. 구겨진 비닐이 반사하는 빛은 비를 맞는 것처럼 흔들렸다. 나는 집중해서 빛들을 따라간다.
저 멀리서 천장에 걸린 옷들의 주머니로,소매로,꾸물꾸물 멸치가 모여든다. 멸치들은 떼를 지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헤엄쳐 나간다. 옷의 비닐이 흔들리면 멸치들은 재빨리 헤엄쳐 가게의 보일러 수증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으로 몸을 숨기고 밖으로 나간다. 멸치들은 등을 청색으로 배를 은백색으로 바꾸어 옷들의 피부를 흔들어댄다. 그것들이 펄떡거리며 지날 때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오랜 시간 고여 있던 느린 시간이 가게 바깥으로 흘러나간다. 옷들은 곧 바다가 된다.
어두운 작업대를 더듬어 이름표를 한 장 끊어낸다. 엄마의 모시 한복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옷의 아랫부분에 이름표를 덧대어 휘갑치기를 한다. 이름표에는 권영숙,세 글자가 적혀있다. 엄마의 옷을 며칠 내로 찾아가는 옷들만 모아놓는 횃대에 걸어놓는다. 모시한복은 곧 주인의 부름에 횃대를 빠져나올 것이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가게 유리를 쳐다본다. 내 머리 위로는 길게 자라나는 열대림이 걸려있다. 그 자리에서 엄마의 모시 한복을 찾아본다. 자동차가 지나간다. 엄마의 옷에 붙은 이름표 위로 멸치 한 마리가 스며들었다 달아난다. 한복의 그림자가 저편으로 흘러간다. 나는,고여 있는 시간을 껴안고 가만히 웃는다.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2007 신춘문예 - 단편소설] 심사평
"문장의 깊이 아는 힘 탁월"
예심에서 올라온 일곱 편 가운데 집중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두 편이었다. 개성이 서로 다른 두 작품을 놓고 우리들은 장점과 단점을 세밀히 비교해나갔는데,질적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아 한 편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옷들이 꾸는 꿈'이 당선작으로 결정된 것은 나머지 한 편이 중복 투고 작품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소설은 일상의 공간을 낯선 공간으로 바꾸어버리는 기능을 갖고 있다. 낯섦은 현실의 가면을 벗겨,가면 뒤에 숨은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획득하는 효과다. 그것은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현실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현실을 다른 눈으로 볼 때 자신과 세계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진다. '옷들이 꾸는 꿈'에서 세탁소의 옷들이 열대림의 나무로 환치되고,육체가 녹아버린 한 남자가 그의 어머니에 의해 냉동실에 버려지고,그렇게 버려진 육체가 바다가 되고,세탁소의 옷들 사이로 멸치들이 헤엄치는 것은 낯섦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장들이 낯섦의 밀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문장의 깊이가 소설의 깊이라는 사실을 이 작가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본심에 올라온 나머지 작품들이 주목을 끌지 못한 것은 낯섦에 대한 치열한 의식이 결여되기 있기 때문이다. 이 결여가 소설을 상투성에 빠트린다.
'옷들이 꾸는 꿈'에서 우리가 가장 아쉬워한 부분은 소설의 중요한 축인 화자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드러난 깊이의 한계였다. 딸의 시선을 통해 나타나는 어머니의 모습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입체성이 결여된 어머니의 캐릭터는 작가가 애써 구축해 놓은 낯섦의 밀도(소설적 긴장)를 훼손시키고 있다.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축하하며,자신의 결점을 깊이 응시하는 작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중하(문학평론가) 정찬(소설가) 김하기(소설가) 박명호(소설가)
2007 신춘문예 - 단편소설]
당선소감 / 이정임
"글 쓸 수 있어 정말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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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자꾸 다른 것들에 손을 대고 기웃거렸습니다. 소설이 쓰고 싶어져 키보드 앞에 서자,그동안 까먹은 문장이 저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기쁜 것보다 사실,무서웠습니다. 그동안의 오만을 몸도 기억하는지 배탈까지 났습니다. 화장실에서 몸 둘 바를 몰라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기뻤습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감사드릴 분이 많습니다. 제게 소설을 써보라고 권해주신 조갑상 선생님,고맙습니다. 웃으시며 잘 썼다,한마디 해주실 때마다 기뻤습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려주신 박훈하 선생님. 바보야,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또 웃을래요.
제 부족한 글에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당신의 고생과는 상관없이 무능력한 딸이 뭘 하든 열심히만 하라고 밀어준 엄마,아직도 수줍은 소년 같은 아빠,잠꾸러기 동생. 껑충한 키로 내 삶의 그늘도 덮어주는 영원한 깜장나무,임성용 씨. 많은 관심과 도움으로 저를 이곳에 서게 만들어 준 은인,만석 선배. 함께 밤을 새워 글을 쓰던 선배들. 국문과 식구들. 글오름,태백 식구들. 사랑하는 친구들. 자기 이름 없다고 섭섭해 할 바로 당신까지.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고마운 분들이 이렇게 절 보고 계시니까요.
◇1981년 부산 출생.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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