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 박영근

시인 최주식 2010. 3. 6. 23:27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 박영근

 

낡은 흑백 필름 속 같은 곳에서

쓸쓸히 늙어가는 내가 보인다

 

한편의 詩를 쓰려면

몇밤을 불면으로 때우는 나를

바겐세일도 하지 못해

백화점 문턱도 넘지 못하는 나의 상품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베스띠 벨리 막 화장을 끝낸 마네킹의 얼굴도 보인다

 

TV 뉴스 속에선 한총련 아이들 최루탄처럼 구호를 터트리고

내 귀엔 환청처럼 들리고

대낮 뜨겁게 타오르던 해가

페퍼포그 연기 속에서 복면을 한다

 

꽃들이 일제히 모가지를 꺾고 파업을 했는가

 

부러진 뼈와 두개골 사이로 새파란

억새를 키우고 있는 공장 위로

기억이 모가지를 부러뜨린 채

하늘을 향해 굴뚝을 세우고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그래 가자

가자

저 유월의 싱싱한 은행나무들이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이로 보일 때까지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창비.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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