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나의 인생] "됐나? 됐다!"… 부산은 내 영화의 영원한 무대
부산,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
'억수탕'부터 '친구'까지 내 영화 10편중 8편을 부산에서 찍었다…
태종대에서 情을 알았고 광복동 극장에서 상상력을 키웠다
문득 봄이었다. 아직 바람이 찼지만 부산 영도 남쪽 끝, 태종대 앞바다에 은빛 물비늘로 부서져 반짝이는 건 분명 봄볕이었다. 살아 있음의 기쁨을 일깨우는 이른 봄날, 죽고 싶도록 아름답다는 태종대를 영화감독 곽경택과 함께 천천히 거닐었다.
곽경택에게 태종대는 정신의 성장판(成長板)이었다. 1970년대 중반 영도초등학교 다닐 때 매일 새벽 아버지를 따라 3.6㎞ 순환도로를 걸었다. 열일곱살 1·4후퇴 때 인민군 징집을 피해 홀로 월남했던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줬다. 평남 진남포 고향마을 얘기, 두고 온 가족 얘기들이었다. 길가 어린 소나무에 아들 이름을 붙여줘 두고두고 지켜보라 했다. 누군가 선물한 다람쥐 한쌍을 갖고 와 아들더러 숲에 풀어주라 했다. 새장 속 새도 날려 보냈다.
부자(父子)는 순환도로를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지금 여느 산보객 코스와는 거꾸로였다. 가파른 첫 언덕을 넘으면 시야 가득 바다가 펼쳐졌다. 이제는 전망대가 들어선 자살바위 앞 주전자섬 뒤로 해가 떴고, 맑은 날엔 대마도까지 내다보였다. 새벽 안개 낀 산책로는 환상적이었다. 뭔가 나타날 것만 같고, 갖은 소리들이 가까이 들렸다.
그는 태종대에서 정(情)을 알았고 상상력을 키웠다고 했다. 부산에서 영화 '친구'를 찍을 때는 장동건 유오성을 비롯한 출연자들을 태종대부터 데려갔다. 함께 걸으면 누구든 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해질 수밖에 없는 곳이 태종대다.
그의 아버지는 피란 시절 부두 노동까지 하는 고생 끝에 부산대 의대에 들어갔다. 곽경택은 늦깎이 개업을 한 아버지가 괜찮은 병원 자리를 찾느라 이사 다니면서 여러 곳에서 자랐다. 벌판에 아파트 한 채만 있던 수영에선 매일 뒷산에 올라 칡 캐고, 들쥐와 메뚜기를 잡았다. 땅에서 뒹굴며 자랐던 시골의 삶이었다. 이어 영도, 범일동, 그리고 광복동에 접한 토성동에 살며 초등학교만 네 군데를 다녔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휴일 낮 광복동엔 싱그런 젊음이 강물처럼 흘러다니고 있었다. 젊은이들을 서면 쪽으로 뺏기면서 한물갔다곤 해도 광복동은 여전히 '부산의 명동'이다. 땅값이 제일 비쌌던 옛 미화당백화점 자리, 지금 ABC마트 앞에서 CF 촬영이 한창이다. 예나 지금이나 거기 한 시간만 서 있으면 친구 열댓은 간단히 마주친다는 곳이다.
곽경택은 '광복동 키드(kid)'였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교 때까지 살았던 '토성상가맨션'에서 육교만 건너면 극장들이 죽 이어졌다. 왕자 국도 제일 부산 대영 부영, 자갈치 쪽 동명까지. 휴일 아침 극장 간판들을 보며 걷다 내키면 들어갔다. 중학 2학년 때 지금 키 173㎝가 다 자라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쉽게 봤다. '보디 히트'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처럼 진한 영화는 앉은 채로 두번 보곤 했다. 이제 PIFF(부산영화제) 광장 주변으로 부산과 대영 극장, 둘만 남아 있다. 대로 건너편 동명극장은 '동명단란주점'의 이름으로만 남았다. 바로 그 곁에 아버지의 '신신피부과'가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 또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살았다. 아들에게 늘 "전쟁통에도 의사는 죽이지 않더라"고 했다. 아버지 뜻대로 곽경택도 의대에 진학했지만 다녀 보니 의사 인생이 답답해 보였다. 영화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정신 나간 놈" 한마디뿐이었다.
곽경택은 지금까지 만든 영화 10편 중 8편을 부산에서 찍었다. 한국적 소재를 찾아온 그에게 부산만한 곳이 없었다. 1995년 뉴욕대에서 돌아와 찍은 '억수탕'부터 그랬다. 무대인 옛 공중목욕탕을 개금동 비탈진 동네에서 쉽게 찾아냈다. '친구' 시나리오는 고교시절 기억과 상상력만으로 썼다. 촬영지도 머릿속에서 바로바로 떠올랐다. 준석과 상택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곳은 부산이 내려다보이는 산복도로 집 옥상, 패거리들이 내달리는 곳은 어릴 적 살았던 범일동 철로변…. '친구'는 배우들보다 도시가 더 많은 얘기를 해준 영화였다.
부산은 지금도 수협이 3개, 어촌계가 50개 넘는 '포구들의 도시'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산 중턱을 구불구불 산복도로가 가로지른다. 해방 후 돌아온 해외동포, 전란 때 밀려든 피란민들이 평지가 좁은 부산에서 산으로 산으로 올라갔던 흔적이다. 현대적 아파트와 빌딩들이 치솟은 해운대는 영락없이 외국이다. 휘황한 광복동, 남포동과 비린내 물씬한 자갈치시장이 큰길 하나 사이다. 부산은 어촌과 맨해튼, 어둠과 밝음, 근대와 첨단이 공존한다.
삶도 그렇다. 19세기 말 개항 이래 전국 각지에서 갖가지 사연을 품은 민중이 맨몸으로 찾아들었다. 곽경택의 어머니도 피란 온 목포 사진관집 딸이었다. 지금도 명절에 일가가 모이면 평안도·전라도·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인다. 부산은 누구 눈치 안 보고 살아가는 자유인들의 도시다.
곽경택은 영화 촬영이 없어도 한 달에 일주일은 부산에 온다. 그때마다 맨 먼저 달려가는 곳이 밀면집과 돼지국밥집이다. 그를 따라 광복동 뒷골목 밀면집에 갔다. 면을 헤치고 고추장 양념을 풀었을 즈음 그는 이미 한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밀면 안 먹으면 집에 온 게 아니다"고 했다. 밀면엔 전란의 아픔, 피란의 배고픔, 고향생각의 간절함이 버무려 있다. 이북 피란민들은 냉면이 먹고 싶었지만 메밀을 구할 수 없었다. 미군부대 구호품 밀가루로 면을 뽑고 돼지 뼈로 육수를 낸 게 밀면이다. 돼지고기로 설렁탕을 대신한 게 돼지국밥이다. 부산은 모든 것을 아우르고 녹여낸다.
부산 사람들은 뒤끝이 없다. 화끈하다. "됐나? 됐다!" 두 마디면 끝이다. 곽경택은 "부산 사람들은 거칠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소리만 클 뿐, 음흉하지도 않고 숨겨둔 셈도 없고 수(手)도 낮다"고 했다. "응어리를 바다에 다 토해내고 살아서 그런가 보다"고 했다.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인생을 만듭니다. 매주 수요일 우리나라 크고 작은 도시들의 풍경 속에서 살짝 빛나는 사람들의 진솔한 생활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의 도시 나의 인생'이 연재됩니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과 박은주 엔터테인먼트부 부장이 현장에서 맛깔나는 기사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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