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워메, 오랜만이구마… 나, 남진 맞소 "

시인 최주식 2010. 4. 14. 20:47

[나의 도시 나의 인생] "워메, 오랜만이구마… 나, 남진 맞소 "

[목포] 가수 남진
무대에선 남진이지만 고향에선 김남진… 친구들 '겁나게' 많은 곳
恨의 도시로 기억되는 건 싫어… 희망의 목포 노래 꼭 부를 것

"남진아! 웬일이여, 집에 왔는가."

"워메, 오랜만이구마. 택시 하는가."

그와 목포(木浦) 구(舊)도심을 걸으며 대화를 하자면 얘기가 자꾸 끊긴다. 선배, 후배, 동창, 동창의 형, 동네 어르신, 참 아는 사람도 많다. 이것만으로도 바쁜데, 슬금슬금 눈치를 보거나 소곤거리며 지나가는 이들을 보면 답답한 듯 이렇게 말한다. "안녕하쇼. 남진 맞소." 공항에서도 그랬다. 잠시 한눈을 팔고 있으면 그는 사라졌다. 하나, 찾는 데 오래 걸리진 않는다. 여럿이 모여 왁자한 웃음소리가 나는 곳에 그는 있었다. "무대에선 남진(南珍)이지만, 무대 밖에선 김남진(金湳鎭·본명) 아니요."

남진(64)은 아직도 '전남 목포시 창평동'이 주소로 찍힌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닌다. 오래전 만든 것을 뒷면만 바꾸어 사용하는데, 지금 주소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로 시작하는 것을 갖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절반은 '전라도 미남' 남진 팬, 다른 절반은 '경상도 사나이' 나훈아 팬이었던 시절의 주인공, 바로 그 남진이 아닌가.

"남진 오빠 왔다"며 반찬을 살갑게 챙겨주는 선창가의 영해복집에서 밥을 먹고 나와 창평동에 있는 일명 '남진 블록'을 찾았다. 국회의원이자 호남매일신문 사장이었던 아버지 고 김문옥씨(65년 타계)가 운영했던 정미소와 공장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관리인이 "올여름에 물받이를 안 갈면 큰일난다"고 투정하는 낡은 건물이지만, 1000평 터만 봐도 그 옛날 얼마만한 거부였는지 짐작이 간다. 대각선에 있는 그의 집 역시 잘 생긴 소나무와 굵은 동백나무가 집터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집 2층 방에서 남진은 나일론 양말이 해지도록 트위스트를 추어댔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는 것이 전생의 복덕에 기인한다면, 그는 전생에 장군이었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52년에 포드 자동차를 몰았고, 여름이면 아버지 배를 타고 앞해도(島), 톱머리로 물놀이를 다녔다. 아들이 풍각쟁이 되는 걸 당연히 반대했던 아버지를 뿌리치고 그는 목포고 졸업 후 64년 서울로 올라왔다. 철없는 부잣집 아들이 서울에 올라와 모진 고생을 했어야 '스토리'가 이어지건만, 그는 상경 이듬해인 65년 '울려고 내가 왔나'로 스타덤에 올랐다. 노래 '가슴 아프게'가 히트하고 나면, 그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또 히트하는 시대였다.

그러다 해병대 204기로 입대해 백령도·포항 등 국내에 10개월, 그리고 월남에서 26개월을 복무했다. 3년을 꽉 채우고 71년 제대했더니 인기는 더 폭발했다. 나훈아와의 대결구도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나훈아가 구수한 이미지로 승부했다면, 그는 좀 더 모던한 곡으로 세상을 홀렸다. '님과 함께',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대여 변치 마오'….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그를 위해 '팬클럽'이 결성됐고, 그의 인생은 언제나 저 푸른 초원 위에 펼쳐지는 그림처럼 보였다.

"그러다 뉴욕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하고 거기서 식당하면서 80년부터 해마다 딸 하나씩을 낳았어요. 어머니는 난리가 났죠. 그래서 병원 가서 검사를 해보니 넷째는 아들이래요. 아들이면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낳아야 된다 싶어서 들어왔죠. 그런데 그게 참 희한한 게, 그렇게 애 넷에 아내를 거느린 가장이 되니 세상이 딴판으로 보입디다."

돌이켜보니 인기 절정일 땐 그게 축복인 줄도, 천직인 줄도, 목숨 걸고 지킬 줄도 몰랐다. 83년 돌아왔더니, 웬일인지 출연해달라던 방송사에선 갑자기 말을 바꾸기 일쑤였다. 가장(家長)이라는 말에 꽤 무거운 추가 달려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이 꽤 버겁다는 것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향에서 나이트클럽 등 사업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다 사단이 생긴 건 89년. 서울 타워호텔서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허벅지 깊숙이 큰 칼을 맞았다. 고향에서부터 괴롭히던 '조직원'들이었다."딴 동네였다면 내가 피했겠지. 그런데 그들이 우리 고향 사람들 아니겠소. 내가 그런 건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지."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사람이 고향사람들이라 더 아팠다. 고향이 섭섭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그때뿐이었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솜씨 좋은 어머니와 살갑게 가정을 꾸렸고, 누나들이 있었고, 친구도, 여자친구도 '겁나게 많았던' 곳이 바로 고향 목포인데,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의 눈에 목포는 최초의 개항지 중 하나였던 곳, 우리나라 1호 여성소설가 박화성과 선배가수 이난영이 났고, 수없는 화가와 예인이 났던 곳, 그리고 삼학도(三鶴島)가 아름다웠던 곳이다. 그런데 바로 '삼학도' 부분에서 그는 마음이 상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시절, 대·중·소 삼학도에 조선소와 공장이 들어섰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목포의 눈물)에 나오는 그 삼학도는 이름만 남았었다. 2004년부터 세 섬의 물길을 뚫는 일이 시작됐지만, 그의 말마따나 "산봉우리 없어진 것은 어쩔 것이여"다.

그렇다고 그는 자기 고향이 '목포의 눈물'만 부르는 도시, '한(恨)의 도시'로만 기억되는 건 싫다. 그 자신도 고 박춘석씨 작곡의 '서글픈 종착역' 같은 슬픈 목포를 불러본 적이 있지만, 그 느낌이 그리 달갑지 않다.

"내가 정종득 시장에게 부탁을 해놨소. 고향 시인이나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가사를 좀 받아 달라고. 낭만이 있는 목포, 희망이 있는 목포를 가사로 잘 써놓으면 내가 꼭 부르겠다고 말이요."

이 한(恨)없는 '모던 보이'는 예순이 넘어, 가수 데뷔 45주년을 맞으며 제대로 고향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