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한국명시

밥그릇에 심은 꽃 / 유홍준

시인 최주식 2010. 4. 14. 22:38

밥그릇에 심은 꽃 / 유홍준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한 포기
얻어 왔다 화분이 없다 이가 빠진 사기밥그릇 하나
꺼냈다 꽃을 심자면 밥그릇 밑에
구멍을 내야지 구멍을
뚫어야지
십자드라이버 망치 콘크리트못
당치도 않는 연장들을 이용해
밥그릇 깨질까 조심 밥그릇 깨질까 조심조심
구멍을 냈다 구멍을 뚫었다
바늘구멍 하나 없지만
늘 줄줄 밥이 새는 내 밥그릇
먹어도 먹어도 허기로 쩔쩔매는 내 밥그릇
단 한 번도 가득 채우지 못한, 내 고단한 생을 사기친 내 밥그릇
문제였구나 구멍이
구멍 없는 밥그릇이 날 죽였구나
밥그릇 밑에 구멍을 뚫고
이름 모를 꽃 한 포기 심어 신발장 위에 놓으니
와! 갑자기 내 생의 출구가 환해졌다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시집 <喪家(상가)에 모인 구두들> 실천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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