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거미 역사책 / 정연희
호랑거미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다
그는 가늘고 질긴 실로 짠 둥그런 천을 올리브가지 사이에 내걸었는데
씨실과 날실의 간격이 일정한 흰 비단 천이다
호랑거미가 그 천위에 엎드려 사초史草를 쓰고 있다
물감을 찍어서 세필로 깨알처럼 써내려갔다
햇살을 받은 글씨를 들여다보면 무지개 빛깔이다
중요한 일은 올리브 새순 같은 연두와 흰 물감을 듬뿍 찍어
굵은 글씨로 써놓았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서
고대 상형문자 같은 글씨를 해독하기로 했다
그 글씨에는 거미들의 오랜 역사가 낱낱이 적혀 있다
그의 조상 아라크네는 베를 잘 짜는 여인,
자만심에 여신과 겨루기를 하며 신들의 비행을 모조리 짜 넣었다
여신보다 천을 더 잘 짰지만 시샘을 받아 거미가 되었다
지금 저 호랑거미가 그 솜씨를 이어받아 깨알 같은 글씨를 써내려간다
두루마리 천을 짜는 방법과 물에 젖지 않게 하는 방법이 쓰여 있다
저 호랑거미는 오랜 세월
천에다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서사시를 썼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그 내력을 기록할 것이다
줄을 슬쩍 흔들자 호랑거미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호랑거미가 나와 겨루어 질긴 천위에 내 일상을 속속 기록할 것이다
저 씨실과 날실로 내 비행을 새겨넣을 것이다
시집<호랑거미 역사책> 2010. 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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