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흑싸리꽃 / 이은채

시인 최주식 2010. 6. 15. 23:05

흑싸리꽃 / 이은채

 

정형외과 대기실에서 문득, 그의 부음을 본다

무심코 넘기던 조간신문 행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름

살아 감히 끼어 들 수 없는, 두 번 다시 기록될 수 없는 부음난

분분, 흑싸리꽃 폈다

주검은 이렇듯 한순간에, 흑싸리껍데기로 발견되는 걸까 참 낯선,

그의 이름을 축으로 부옇게 회전하는 망자의 이름들

욱신욱신 세차게 박동하는 철제침대 휠체어 목발

틈새에 끼어 휘뚝, 휘뚝, 흐려지는 대기실

저기 저 붕대를 두른 목이며 팔 다리 허리, 손가락 발가락들 수두룩한데

하필 당신 보이지도 않는 숨을 그러쥐고 딱, 화투장 뒤집듯―

잿빛 카디건을 걸치고 앉아 힘차게 붓질을 하던 그를

호방한, 헌칠한 모습의 그를

각인하듯 필사적으로 내리치는 장대비

질기고 팽팽하던 인대 하나 끊어졌다

 

시집<북> 2010.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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