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단추 / 이은채
방사선과 탈의실 구석에 잠시나마 누군가의 체온을 실었던 가운들이 허물처럼 수북이 쌓여 있다
외투를 벗어 걸다 말고
블라우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추 사이에 슬며시 손을 밀어넣는다
다가와 고요히 안기는 젖무덤
한때 터질 듯 팽팽하게 끓어오르던 시절이 있었겠다
앞자락에 매달려 흔들리는 무슨 열매 같기도 열매 이름 같기도 한 단추들
차례로 눌러 연다
덜컹이는 가슴 애써 싸안고 온 브래지어를 고탄력 팬티스타킹을 가까스로 달래어 벗긴다
서늘한, 여기 어디 무른 틈새에 우물같이 깊은 죄를 묻었던가
뒤늦게 사진에 미쳐버린 K는
모처럼 흑백사진 몇 컷 제대로 찍어두는 거야, 알았지?
병원 입구에 날 내려주며 볼우물에 윙크까지 해댔다
나 맨몸에 갓 세탁된 가운, 익명의 허물을 걸쳐 입고 묵묵히 사진 찍으러 간다 그 죄 낱낱이 고하러 간다
마주보고 고하고 돌아서서 고하고 누워 고하고 엎드려 고하고 좌로 구르다 우로 구르다 거꾸로 매달려 찰칵, 찰칵, 찰칵……
나는 자꾸 더듬거리며 블라우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추 사이에 손을 밀어넣는다
주홍빛 슬픈, 불혹의 네 번째 단추가 고갤 숙인 채
더욱 붉게 뜨겁게 매달리고 있다
시집<북> 2010.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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