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ESSAY] 세월의 황금 연못/한수산 작가·세종대 국문과 교수

시인 최주식 2010. 10. 10. 17:50

굽이쳐 흘러간 세월들이 아름다운 황금 연못이 되어 거기 있었다
무대 위의 한 연기자와 객석의 나 사이에…
시간은 언제나 여기 있고 사라져 가는 것은 우리들일지 모른다

부슬부슬 내렸다 그쳤다 하는 빗속을 뚫고 연극을 보러 갔다. 아니, 배우 한 사람을 보러 갔다. 지난 여름 어느 저녁의 일이었다.

'극단 김금지'의 제9회 정기공연이었다. 화사첩(花蛇帖), 가상의 왕국에서 3대째 권력을 이어가고 있는 대왕대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궁중의 권력 암투를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연극을 보러 간 건, 포클레인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소일하는 임금을 곳곳에 삽입하며 오늘의 권력을 은유하려 한 작의도, 궁중의 암투도 아니었다.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핏빛 무대의상으로 감싼 배우 김금지, 그녀를 바라보면서 문득 떠올렸다. 언제였나, 배우 김금지, 그녀의 무대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던가.

김금지의 사진을 책꽂이에 붙여놓았던 시절이 있었다. 기억조차 아슴푸레한 그 시절을 건너, 무대에서 그녀의 모습을 만나기까지는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대학시절 서울로 올라와 처음으로 명동의 국립극장 무대에서 김금지를 만났다. 아, 박근형·김금지 주연의 '연인 안나'. 요즈음은 TV 드라마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하루 세끼 밥이나 차려달라고 하는 삼식(三食)이가 되어 구박이나 받는 가련한 처지로 전락해 있지만, 그때의 박근형은 무대의 히어로였다. 후리후리한 몸매에 수려한 얼굴의 미남 배우, 같은 남자도 숨을 멈추게 하던 그와 함께 애절한 사랑과 삶을 그려내는 '연인 안나'의 안나가 내가 처음 만난 김금지였다.

이제는 사라진 명동의 저 국립극장, 내 추억은 춥고 썰렁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다가 "둥" 하고 징소리가 울리면 맨 앞자리로 가 앉아도 될 만큼 객석은 늘 비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 무대에서 '불의 연기자'라고 불리던 김성옥의 명연기도 만났고, 목소리부터 객석을 압도하던 신구가 펼치던 혼신의 연기를 보았다. "너희들이 게 맛을 아냐?" 하고 킬킬거리는 오늘의 신구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젊은 나이에도 노역을 맡아 놓고 하던 이락훈도 그 무렵 거기서 만났었다. 그때의 그 이락훈은 어느새 이미 세상을 떠나고 우리 곁에 없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 burbuck@chosun.com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도 김금지의 연기로 보았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도 그녀의 것이었고, '페드라'까지 그녀가 했으니 한국 연극의 큰 흐름이 바로 그녀의 삶이었던 것이다.

나이 들면서도 한 배우의 무대를 이렇게 오래 만난다는 기쁨에 잠겨, 연극 '화사첩'의 흐름과는 달리 나는 내내 행복했다. 그렇다, 그것은 황금연못이었다. 나이가 든 그만큼 김금지의 무대에서 싱싱했고, 세월은 황금빛이 되어 출렁였다. 나이가 든 아름다움이었다.

세월이 가르치는 건 또 있었다. 공연 안내 팸플릿에서 김금지는 '공연보다는 연습 때가 더 행복한 편이라 공연날짜가 다가올수록 행복한 날이 떠나가서 안타깝습니다'라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덧붙이지 않는가. 저 옛날에 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면 '9시 뉴스에, 4대 일간지에 수없이 대문짝만 하게 나왔어. 다 옛날 얘기야' 하면서 '아! 옛날이여'를 되뇌었다고 연출가와 나눈 이야기를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지 않은가. 배우 김금지도, 무릇 나이 들면 누구나 그렇게 되듯이, 세태의 변화를 상스럽게 느끼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니. 아니, 그것을 넉넉한 마음으로 넘어서고 있었던가 싶었다. 그랬기에 '연습 내내 행복했고 내가 사랑하는 연극을 연기를 할 수 있는 건강과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겸손에서는 더욱 그녀의 그 넉넉한 나이 듦이 원숙함이 되어 가슴에 와 닿았다.

독일 어느 묘지의 묘비명이 생각났다.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시간은 여기 있고 사라져 가는 것은 우리들이다.' 그렇다. 시간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여기 있고, 사라져 가는 것은 다만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뒤를 이어 젊은이들은 자라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 가리라. 그러나 우리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굽이쳐 흘러간 세월들이 아름다운 황금연못이 되어 거기 있었다. 무대 위의 한 연기자와 객석의 나 사이에.

1917년 마르셀 뒤샹이 '앙데팡당'전에 남성용 소변기 하나를 올려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였을 때 그것은 혁명이었다. 문화는 때로는 그렇게 혁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의 본질은 쌓이고 다져지는 오랜 시간의 집적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나는 믿어왔다.

'연인 안나'에서 '화사첩'까지 배우 김금지와 함께 나도, 한 사람은 무대에서 한 사람은 객석에서 먼 길을 왔다. 그렇다면 이것도 우리들 안에서는 문화의 집적이다. 한 길을 걸어왔고 또 걸어가고 있는 연기자 김금지의 모습이 그래서 더 귀하게 고맙게 생각되었다.

비가 그친 극장을 나와, 그 행복감을 가만히 매만지며 천천히 대학로를 걸었다. 저 옛날 김금지의 연극을 보고 돌아가던 날 나는 혼자였다. 그러나 이제 극장을 나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내 옆에는 나이 들며 세월을 함께해 준 아내가 있었고, 어느새 서른을 넘어서는 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