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위대한 절판
- ▲ 이기웅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열화당 발행인
교사며 목회자며 작가며 학자며 재판장이며 출판편집자며
말의 관리자들은 모두 들으시오
시장바닥에서 말을 팔며 생계유지를 위해 급급하지 않은지…
책보다 거대한 "절판하라" 말씀에 고개를 숙입니다
법정(法頂)은 그의 유언에서, 어리석음으로 하여 저지른 허물을 용서 빌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우리에게? 알 수 없으나, 여하간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를 용서함으로써, 최소한이지만 우리도 용서받을 겨우 한 가닥을 찾을 수 있으므로.
지난 2월 24일자로 공증을 거쳐 발표한 법정님의 유언을 듣고, 지난 며칠 동안을 나는 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유언의 요점은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생에서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엊그제, 담양(潭陽) 쪽의 나들잇길에서였습니다. 그곳의 한 정자에서 잠시 낯선 스님과 마주하는 일이 생겼지요. 나는 "법정께서 그분이 지어 출판한 모든 책을 절판하라 유언하셨다는데, 이 무슨 뜻일까요?" 하고 묻게 되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분은 "작은절 작은중이 그 어른의 깊은 뜻을 감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평생 동안 베푸셨던 당신의 말씀을 책임지시겠다는 뜻일 터이지요"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도대체 '말'이란 무엇인가요. '말빚'은 또 무엇일까요.
언제인지 딱히 알 수 없으나, 인간은 태초(太初)의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한줄기 '말씀의 빛'을 찾아내었지요. 놀라워라, 인간의 예지(叡智)여! 3000년에서도 훨씬 앞선 시기에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수메르문자며, 이집트문자, 저 아름답기 그지없는, 영혼의 지도와도 같은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보십시오. 인간세상은 이 오랜 시간 동안 그 빛에 의탁하여 인간 사회의 위대한 질서를 얻어내었고, 스스로 자긍(自矜)하는 문명인간(文明人間)의 역사를 아로새겨 왔지요. 원시언어와 원시문자에서 시작된 말이라는 도구는 문자 활자 문학 학문 예술 등으로 표현되는 저술과 기록의 방법으로 온갖 문명과 문화를 빚어내었습니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어느 사이에, 굴레에 가깝다고 할 액운이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어 왔지요. 그 말들은, 어찌 보면 문명이 아니라 야만(野蠻)으로 보이는 제도까지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숨을 멎게 할 듯한 교묘한 글솜씨와 말솜씨는 놀라운 기술들과 반응을 일으키면서 이제는 사람 죽이는 일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까마득한 태초의 빛인 말씀은 이제 조잡한 탁류에 휩쓸리게 되었지요. 교묘한 시장논리는 이 탐욕의 물결을 더욱 거칠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삶이 길어야 육십에서 구십인데, 그 기간 동안 자라고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즐기고 그러다가 깨닫기까지, 얼마나 숨차고 분주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디지털시대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우리로선 지극히 잘 알고 있는 터이지요. 깨닫고 가신 자(覺者) 법정은 이 괴로운 시대에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그가 인간된 가치를 찾아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우리는 이제 잘 알 것 같습니다.
깨달은 자여, 영원하라! 그가 아름다운 영혼의 말씀을 골라 그 말에 의탁하여 얘기하고 글쓰고 엮어 책 내고, 그래도 뭔가 흡족치 아니하여 울부짖다가, 종내에는, 당신의 어리석은 탓에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며 장엄하게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소리없는 그 어른의 '큰 말씀'을 듣습니다.
출판으로 평생을 살아온 나는 오늘 저 '위대한 절판(絶版)'의 뜻을 생각합니다. 말의 관리자들, 곧 교사며 목회자며 작가이며 학자며 재판장이며, 그리고 출판 편집자며 디자이너들은 들으시오! 연단에서나 책의 형식으로나 시장바닥에서 말을 팔며 생계유지를 위해, 치부를 위해 급급하지나 않은지 깊이깊이 생각하도록, 그분의 유언이 매서운 죽비 되어 우리의 어깨를 후려치도록 내버려 둡시다.
꽃피고 꾀꼬리 우는 산모롱이에 황소가 음매애 합니다. 낮은지붕 가을섬돌 밑에서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합니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이들의 말이지만, 오늘 시장바닥에서 외쳐대며 팔고 있는 말들에 견주어 봅시다. 위선과 편견과 교만으로 얼룩진 말들에 비하면, 얼마나 고운 말의 값어치인지, 누구나 금방 압니다.
말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말로써 평생을 사신 법정은, 더 이상 진리를 향해 다가갈 수 없다는 인간된 한계를 깨달으시고 용서를 구하셨지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법한 외침, '절판 유언'을 이제 용서해 드립시다. 모든 책이 절판되었지만, 그 책들 대신에 거대한 한마디의 말씀, 그 책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큰 말씀 '절판하라'를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아직까지도 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그 어른의 이 생각과 말씀을 베개 삼아 잠들고 지팡이로 의지하여 사는 사람이 되기를 고개 숙여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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