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이렇게 눈이 내리면 외갓집이 생각난다
- ▲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
꿈인 듯 가물가물하다. 눈 내리는 망월리. 추억 저편에 살아 있는 외갓집. 수수깡 울타리 싸리문을 밀면 초가삼간 조그만 마당이 나왔다. 그때 망월리는 초가집 서른 채가 햇빛 바른 동산 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작은 마을이었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면 망월리 초가들 방 안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초가지붕들은 금세 하얗게 바뀌었고 지붕에 못 내린 눈송이들은 작은 마당에서 춤을 췄다. 어른들은 눈을 보리 이불이라 부르며 풍년을 기다렸다.
그날도 눈이 많이 왔다. 온 세상이 눈천지였다. 다섯 살 나는 외갓집 툇마루에 앉아 처마 끝에 매달린 수정 고드름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휘어진 잔가지에서 눈이 미끄러졌다.
"야, 서울뜨기, 만날 외할미집에 얻어먹으러 오니?" 마을 아이들이 말을 걸어왔다. 우물가 미루나무에 굴뚝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내려앉았다 한다. "서울 깍쟁아! 너 벙어리니? 얼레꼴레 서울 벙어리래요…."
나는 깔깔 놀려대는 아이들에게 대꾸도 않다가 벌떡 일어나 마을 앞산, 오산 읍내로 이어지는 동구밖길을 내닫기 시작했다. 서울 우리 집에 가야겠다는 한마음으로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 산모롱이를 마냥 지쳐 올라갔다. "정일아, 정일아!" 뒤따라와 나를 꼭 껴안는 엄마 눈에 물기가 배어났다. "애들이 네가 귀여워 그러는 게야. 내일 엄마랑 기차 타고 서울 우리 집에 가자, 응?" 나는 엄마를 뿌리치고 잰걸음을 놀렸다. 골이 난 나를 다시 붙잡으며 엄마는 정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일아, 까치밥 모르지? 엄마가 까치밥 볶아줄게." 나는 까치밥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까치밥이 뭔데?" 엄마가 가리킨 산등성이 햇살 바른 곳에 깊은 겨울잠 자며 한가득 열매를 단 까치밥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엄마는 풀끝에 옹기종기 열린 까치밥, 수수이삭보다도 더 작은 자주색 열매를 훑어 앞치마 주머니에 담기 시작했다. "까치들이 겨울에도 통통하고 예쁜 건 이 까치밥을 먹기 때문이란다." 엄마는 나를 업고 망월리 산모롱이로 내려갔다. 엄마의 등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나는 엄마의 목을 감은 두 팔에 꼭 힘을 주었다. 돌아보시며 환하게 웃던 어머니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는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하얀 눈꽃 같았던 어머니의 얼굴이 가슴을 시려온다.
그 눈 많았던 겨울은 6·25 전쟁의 겨울이었다. 그 전쟁이 어머니를 내게서 데려갔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면 그해 망월동 외갓집이, 그 환하던 어머니 얼굴이 생각난다. 날이 저물고 그 초가삼간들에 눈이 쌓인다. 철이를 잠재운 눈이 철이네 지붕 위에 쌓인다. 순이를 잠재운 눈이 순이네 지붕 위에 쌓인다. 들녘 수수깡 밭을 휩싸 안는다. 새 눈밭 위에 고양이 발자국이 찍혀 있다. 고요 속에 문득 내쉬는 입김이 안개처럼 하얗게 떠올랐다 사라진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눈싸움 한 번이면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마음은 훈훈해진다. 두 패로 나뉘어 눈으로 성을 쌓는다. 성 위에는 이삭 달린 수수깡을 꽂는다. 꽹과리가 울리면 눈싸움 시작이다. 어느 쪽 눈덩이든지 맞기만 하면 퇴장이다. 잘 피하면서 상대의 수수깡을 쓰러뜨려야 한다. 수수깡을 뽑든지 성을 무너뜨리든지, 또는 눈덩이로 수수깡을 마구 때려서 쓰러뜨린다. 수수깡이 쓰러지면 꽹과리가 울리고 눈싸움이 끝난다. 아, 그해의 겨울은 그렇게 다가왔다. 망월리 외갓집 겨울은 내 기억 속에 그렇게 남았다.
추운 날 아이들은 자줏빛 생강처럼 빨갛게 언 손을 불면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사람은 우리보다 키가 크고 마치 김장 항아리처럼 배가 불룩했다. 옥수수 곰방대를 입에 물리고 호두로 코를 만들고 숯으로 두 눈을 달아주었다. 아이들이 눈사람 둘레를 돈다. 인사하고, 손뼉 친다. 눈은 땅을 감추고, 바위를, 식물을, 산골짜기 시냇물을 감추고, 초가지붕들을, 새를, 짐승을 감추었다. 그 경관에 누구나 탄식 참지 못하리. 그 겨울 전쟁이 어머니를 앗아갔어도 내 기억 속 외갓집의 눈은 아직도 정겹다.
망월동 텅 빈 채소밭에 햇살이 떨어지면,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집만 덩그러니 남으면, 하얗게 눈 덮인 전신주 잉잉 울어대면, 추운 겨울 밤바람 물결 치면, 어두운 하늘에서 함박눈 펄펄 쏟아지면 동네 아이들은 그 꿈을 또 꾸겠지. 어느 날 배불뚝이 눈사람에도 생명이 깃들 거라는 걸. 감초 할아버지네 굴뚝 끝에서 찾아낸 낡은 밀짚모자를 눈사람에 씌우자 눈사람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껄껄껄 웃다가 펄펄 뛰기도 한다. 커다란 눈사람이 저기 달려가네. 옥수수 곰방대를 입에 물고서. 자줏빛 생강 손 호호 불며 우리가 만든 눈사람이 달려가네.
꿈인 듯 가물가물 눈 내리는 망월리.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면 오늘 밤도 나는 꿈속에서 60년 전 외갓집 초가삼간 겨울밤을 헤맨다. 눈을 만나고, 아이들을 만나고, 눈사람을 만나고, 어머니를 만난다. 그래서 나는 눈이 인간의 꿈을 보듬고 생명까지 감싸안는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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