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時調)창작법

익살과 해탈의 수행승-강로담의 시세계 / 신원철(시인

시인 최주식 2011. 1. 17. 22:49

익살과 해탈의 수행승

-강로담의 시세계

신원철(시인)


깨달음도 멀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어찌 녹야원을 멀다고 여기겠는가

다만 벼랑 같은 높고 험한 길이 걱정스러울 뿐

의업이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것도 아니다

여덟 탑은 참으로 보기가 어렵고

참구할 저술도 오랜 세월에 불타버렸으나

어느 사람의 소원이 원만할까

보았다, 오늘 아침에

-「마하보리사에서」혜초 저, 로담 역


승려시인의 시세계는 일반 속인들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추구하는 세계가 속인들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속인들의 경우 물론 시를 쓰는 즐거움이 가장 큰 원동력이겠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시를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시승의 경우에는 뭔가 좀 다를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불가에서는 출가사문의 몸으로서 시를 쓰는 행위를 좋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 수행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되려 이름을 추구함으로써 진리를 구하는 데는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 예로 든 혜초스님의 시를 보면 고난의 구법행을 하면서 느낀 감회가 참으로 절절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를 남기지 않았으면 설산을 넘고 사막을 건넜던 스님의 고행을 어찌 우리 중생들이 가까이 접할 수 있겠는가. 진리를 찾는 구법행은 참으로 지난하다. 그 과정을 시로 남기는 것은 결코 헛되고 진리를 탐구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통하여 출가자는 자신의 결의를 더욱 다지고 속인들이 그 탈속한 정신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서양문학의 경우에는 종교시라는 장르가 따로 있을 정도로 그들의 종교적 갈등, 고뇌, 환희를 즐겨 시화했었다.

필자는 로담스님과 두 어 번 면식이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그 시의 저자를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다. 아무런 편견 없이 그 시를 흠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탁을 받고 일단 이 스님시인의 가장 최근 시집 『뭐』부터 읽어 보았다. 그 뒤에 공광규의 평이 달려 있었고 또 불교문예 봄 호에 마침 김의수의 서평도 볼 수 있었다. 공통된 의견은 이 시집에 그 이전에 발간된 4권의 시집과는 현격한 기량의 차이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두 평자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그 시적인 기량도 기량이지만 수행자 로담이 그 시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떻게 시화되어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읽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일단 이 시인이 1991년 발간한 『젊은 날에 쓰는 편지』, 94년 펴낸『차마 떠나보내지 못한 사랑으로 사랑하렵니다』, 96년의『나 너답지 못하다고』, 97에 발간한『꽃이네요 꽃밭이네요』네 권을 하나로 묶어 보았다. 91년에서 7년까지 6년간 무려 4권의 시집을 상재했으니 꽤 다산이었던 셈이다. 그 후 10년의 공백이 있은 다음 2008년에 『뭐』를 발간했으니 이 기간 동안에도 틀림없이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기간 91-7년까지의 시는 시인으로 서서히 익어가는 시기라 할 것이다. 이 시들에서는 젊은 출가 사문의 순진함, 비장한 각오 등이 별 걸름 없이 쉽게 씌어져 있다. 먼저 첫 시집에 실린 다음의 시를 보자.


비가 옵니다

온 대지를 꼬오옥 안아주고 감싸주듯

부처님 자애같은 비가 옵니다.

나는 그 속에서 잠을 설치는

한 그루 보리수나무가 되어 있습니

-「비가 오는 날이면」부분


절집에서 비 오는 날 마당을 내다본 경험이 있는가. 산사에서의 빗줄기는 강하다. 그 흙 마당에 홈을 파거나 탑신을 적시며 세차게 흘러내리는 빗물을 감상해본 적이 있는가. 아직 젊은 로담은 거기서 부처의 자비를 보고 있다. 그 자비란 초파일 연등만 타고 내리는 것이 아니다. 비, 바람, 구름, 햇볕 모두가 법신불의 현현이 아니겠는가. 그의 시에는 오는 비에 대한 감상이 자주 시화되고 있다. 「비 오는 날의 궁상」이라는 시에서는 “대숲에 이는 바람처럼/ 유월의 비바람 소리가/ 하도 좋아” 턱 고이고 마당을 내다보는 모습이 장난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도반들과 같이 하고 있다. 순진한 도반들의 모습은 “토방에 쭈그리고 앉아/ 이렇게 이는 비바람 소리가/ 님 곁으로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모다들 좋아 웃습니다” 라고 묘사되고 있다. 이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한다. 이제 수행을 시작한 젊은 행자들의 장난스러운 모습이 눈앞에 번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둘째 시집 『차마 떠나보내지 못한 사랑으로 사랑하렵니다』에서는 출가 초기 부처에 대한 귀의심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습니다

님은 완전하십니다.

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기나긴 기다림과

깊이 있는 이해함이었습니다.

...................

시기와 질투를

사랑으로 안은

투명한 거울과 같습니다.

.........................

안온한 미소와

꾸밈없는 애어로

방황을 잠들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부분


부처의 위신력에 한없이 기대고 싶은 젊은 수행자의 모습이 보인다. 수행의 길은 고되다. 그 수행의 길은 부드러운 미소로 이끌어주는 이가 부처님이다. 부처의 모습은 기다림과 이해와 “안온한 미소,” “꾸밈없는 애어”로 나타나고 있다. 출가하고 나서 한두 번 방황하지 않은 사문이 있을까. 큰 스님 원효도 의상도 한 번씩은 겪었으리라. 그런데 그 방황과 갈등을 편안하게 받아주시는 분이 있으므로 결국은 그것을 이겨내고 깨우침의 길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둘째 연이다. “투명한 거울”은 단지 투명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허물과 과실을 사랑으로 안는 푸근함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속에서 수행자 로담은 편안하고 안온하게 수행에 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또 한 편의 시가 주목을 끈다. 


이 민족 허리띠를 풀어헤치는 그날이 오면

동방 향적세계

금강산 유점사를 찾아 발심 출가하여

북방 무우세계

묘향산 보현사에서 한 소식 얻은 후

남방 환희세계

지리산 화엄사에서 보림을 하고

서방 안락세계

구월산 패엽사에서 무여열반에 들고 싶네

-「출가사문의 기도」전문


민족 통일의 그날을 염원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흔한 테마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출가자 특유의 시각을 읽을 수 있어서 이채롭다. 네 개의 명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구월산(셋이 이북에 있다)이 등장하고 각 산마다 동서남북의 극락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 원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구체적인 산 이름을 예시하고 각 산마다 하나씩의 세계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이 시는 훨씬 단단한 생명을 갖는다. “허리띠를 풀어헤치는”이라는 비유도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 수행자로서의 모습은 다음 시집 『나 너답지 못하다고』에 와서는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여기서는 초보적인 수행의 다짐이나 각오 부처에의 귀의 같은 것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수행자 특유의 눈이 보인다. 일단 세 가지를 보자


모질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 같다

저 내리는 비는

사바의 티끌을

씻는 듯 하고

-「소낙비」부분


물은

그 성품이 맑아

제 색깔이 없으되

깊으면 깊을 수록

하늘을 닮아 짙푸르다.

-「물」부분


나무는

바람과 소근대기도 하고

쓰삭거리기도 하고

때론 대 토론도 하고

어쩔 땐 고함 고함 지르며 싸우기도 한다.


나무는 그러나

더 깊은 대화를

대지와 침묵으로 한다.

-「나무의 대화」부분


수행이 경지에 이를수록 수행자의 눈에 비친 사물은 속인들의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라진다. 그래서 소나기의 소리는 개구리의 합창처럼 요란스러우면서 “사바의 티끌을” 씻어내는 것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물도 그냥 화학적인 물이 아니라 본성적인 물이어서 “제 성품이 맑아”라는 구절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된다. 제 색깔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깊을수록 하늘을 닮아가는 물의 속성은 역시 수행자의 눈에 비친 물의 본성이다. 그것은 나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나무와 가장 많은 소리를 주고받는 것은 바람일 것이다. 바람과 부딪치면서 나무는 온갖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더 깊은 대화는 대지와의 말 없는 대화이다. 말이 많다고 해서 교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없이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시각은 신선하다. 이런 것은 자연 속에 파묻혀 자연과 일여가 된 수행자의 눈이 아니면 찾아내기 어렵다. 사바의 티끌을 씻어내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아무리 되뇌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나무와 바람과 대지의 대화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역시 범상한 사유는 아니다. 그 수행정진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간밤 용맹정진을 마친

샛별은

무명업식을 털어내는데


사바의 속살은

봉은사 탑전 돌향로에 이는 향운으로

목욕재계를 합니다

-「새벽 예불」부분


아마 새벽예불을 드리기 위해서 시인은 찬 공기를 마시며 대웅전 앞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것이다. 그것을 “간밤의 용맹정진을 마친”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인의 관심이 온통 수행에 쏠려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간밤의 긴 고행을 마치고 저토록 하늘 한 가운데서 찬연하게 빛나고 있는 별이야 말로 “무명업식을 털어내는” 수행자의 좋은 본보기가 아니겠는가. “사바의 속살”과 “돌향로에 이는 향운” 참 좋다.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는 별을 다음과 같이 보기도 한다.


별은 

하늘 저만큼

초가집 초롱불로 초롱거리고

가끔씩 똑똑 떨어지는 상수리 나무 열매는

우물가 물방울 소리와 다듬이질을 합니다

-「능가사의 밤」전문


이 시에서 보이는 시인의 시각은 천진하다. 별을 “초가집 초롱불”로 본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수리나무 열매 떨어지는 소리를 물방울 소리와 비교한 것은 정말 맑은 시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것을 “다듬이질”에 비유한 것도 절묘하다. 로담의 시인으로서의 시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예견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97년에 발간한 『꽃이네요 꽃밭이네요』에서는 먼저 다음의 시가 눈길을 끈다.


옷은 헐고 기웠으나

한 벌의 가사는

인류 중생 복되게 하고


진수 성찬은 아니지만

한 벌의 발우는

자족할 줄 아는

지혜를 증장케 해


백운 끝에 걸사라 하며

생사의 바다에 배가 되고

유정 무정의 불성을 일깨워

지장보살 대원의 감로수로 목 축인다

-「그 이름은 걸사」전문


걸사는 이름그대로 동냥승이다. 원래 승가의 출발은 동냥에서 시작되었다. 부처님도 생전에 하루 한 번씩 공양을 받으셨고 그 전통은 아직도 남방불교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 출가생활에 대한 로담의 사유가 잘 나타나 있다. “한 벌의 가사는/ 인류중생 복되게 하고” 즉 불가에서 가사는 헐면 깁고 또 깁고 하여 누더기가 될 때까지 입는 것이 원칙이다. 아주 헐어서 못 입게 되면 걸레로 만들어 세상을 닦는데 쓴다. 이 얼마나 세상 사랑적인 사고방식인가. 발우 하나에 담긴 밥은 생명연장을 위해서 일 뿐 아니라 바로 “자족할 줄 아는/ 지혜”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생사의 바다에 배가 되”는 것이고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승려의 모습은 그의 말대로 “유정무정의 불성”을 일깨우고 “지장보살 대원의 감로수”를 마시는 것이다. 여기에 묘사된 수행승의 모습은 아주 이상적이다. 이런 수행자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한 이 사회는 얼마나 밝고 따뜻해 질 것인가. 1997년까지 시승 로담의 사유는 이렇게 귀결된다. 수행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즐거움, 고통, 갈등과 같은 것들을 시에 따뜻하게 담았다. 4권이라는 시집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시집 출간만으로 보아서는 약 10년간의 휴식기에 들어간다. 2006년에 『한국의 시승, 고려 편』을 번역 출간하고 다음 해에는 『삼국편』을 역시 번역 출간했다. 자신의 시를 창작하는 일보다는 선배 시승들의 시세계에 몰입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에게 1500년에 걸친 선배 승려시인들의 시가 어떤 의미로 와 닿았는지는 그 책 곳곳에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2008년에 상재한 시집『뭐』에서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 시의 경지가 한결 높아지고 있다. 수행자로서의 경지에서도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사문의 유서」라는 시에서는 “별도 때가 되면// 꽃 지듯 떨어지나니// 인생이야// 이대로 홀가분한데// 꽃 진다고 무상을 논해 무엇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별과 꽃을 통해 수행자의 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끝은 “잘 갔다고 그렇게 잘 갔다고”라는 말로 맺어지는데 이것은 한 인생 흥겹게 놀다간 어느 도승의 할과 같은 울림을 준다. 그렇다. 우리 인생이야 심각하게 생각하면 또 그렇지만 결국 한 바탕의 꿈이 아니겠는가. 이 시인의 장난기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백담사」에서 그는 “물 가득한 바다 되어/ 어부들의 그물질 소리에/ 만선동귀로 흥에 겹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백담사는 큰 절이다. 초파일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불가의 명절이어서 대중들이 구름처럼 모였을 것이다. 아니면 무슨 문학행사가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백담사의 깊은 산속에 따로 떨어진 큰 절이다. 거기에 사람들이 운집한 것은 마치 큰 호수에 고기가 가득 노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만선이다. 아마 이것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쓴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이 이토록 장난스럽고 재미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계속 장난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설중매」의 전문 “독백같은 그리움이 눈이 되고/ 달뜬 외로움이 바람 되어 울었다/ 지친 기다림이 소복 같은 꽃잎으로/ 시린 하늘 향기 그대로 피었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외로운 결기이다. 이 시인의 장난기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역시 설중매와 같은 단단하고 매운 결심이 아닐까.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열린 눈은 모든 사물에서 진리, 법을 듣는 모습으로 발전한다.


벌판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 같은 바람일거나

어느 헤진 가슴을 휘돌아 헤엄치는 너울일거나

보리피리 같은 산새들의 웃음소리일거나

틈없는 바위의 눈물로 맑게 솟아 웃는 옹달샘 미소일거나

한설을 피는 꽃으로 머금은 향기일거나

-「무량한 소리」부분


아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깊은 삼매에 들어있을 이 시인이 잡고 있는 것은 대자연의 소리이다. 바람소리, 너울 소리, 새소리, 물 흐르는 소리, 이 모든 것이 대자연의 소리이면서 사랑의 소리이면서 부처의 법음인 것이다. 세상 만유의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그는 경청하며 가만히 미소 짓고 있다. 세상은 무량한 소리로 가득하다. 그 소리를 듣는 천개의 귀를 가진 분이 관세음보살 아니시던가. 깨우침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듣는 데서 온다. 그리하여 시의 끝은 “진홍빛 참꽃 같은 사랑이 아닐지”라고 맺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대 우주에 대한 깨침은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 특히 「팔월의 저 달은」에서는 뛰어난 경지를 보인다.


부엉이 웁니다.

부엉이 우니 산이 웁니다.

부엉이 울고 산이 우니 달이 웁니다.

부엉이 울고 산이 울고 달이 우니 한 생각인가 봅니다.


한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찰나일 뿐

물도 바람도 구름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팔월의 저 달은」부분


팔월 보름달이 산야를 훤하게 비추는데 거기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달에 훤하게 비치는 산만 보아도 좋은데 부엉이 소리까지 가미되어 시적화자의 마음은 적요하고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부엉이만 우는 것이 아니다. 부엉이 울자 산이 울고 따라서 달도 우는 것이 아닌가. 이 적요한 달밤에 온 우주가 부엉이 울음으로 가득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또 거기서 “한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찰나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모든 것은 순간이며 생각이다. 한 생각에 따라 황홀해지다가 또 슬퍼지다가 흔들리는 것이다.

시집 『뭐』의 전체를 수놓은 것은 한결 더 경지가 높아진 수행승의 사유다. 일반 사람들이 집착하는 재산, 자식, 명예에 대한 욕심이나 수행자들이 갖는 수행의 욕심이나 그 크기에서는 같다. 그의 시집이 온통 수행 이야기로 메워져 있음은 당연하다. 또한 수행이라는 것은 방랑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한자리에 가만히 있어서는 수행자의 원은 게을러지기 쉽다. 구름처럼 천지를 떠도는 걸승, 그것이 로담이 추구하는 이상형일지도 모르겠다.


얻어먹더라도 지조와 배포가 살아 있어 걸사다

그도 없는 거지와 구분되는 것이

여름 장마에 썩는 콩과 싹 나는 콩이다.

그래도 홀로인 지금

새는 잠들고

게으름에 자정이 넘어 축시가 되었다.

-「걸사라기에」부분


재미있다. 아니 솔직하다. 근본적으로 종교인들의 경제활동은 신도들의 보시에 달려 있다. 그것을 그는 “얻어먹”는다 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얻어먹는 것과는 다르다. 썩은 콩과 싹을 틔우는 콩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3행이 재미있다. “새는 잠들고/ 게으름에 자정이 넘어”는 수행자의 겸허한 말로 읽힌다. 여기서 게으름은 그냥 게으름이 아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니 몸은 게으를지 모르나 머리는 한없이 맑게 깨어 있는 것이다. 수행자는 외로움을 벗 삼는다. 그렇게 하루는 넘어가는데 어느덧 시간은 자정이 되고 모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수행의 길은 갈등의 길이기도 하다. 다음의 시는 재미있게 읽힌다.


금지된 선을 넘을 듯

어간문을 열어 젖혔다

부처님 정면으로 마주 앉았다

시간은 주절거리는 망상 숲에

갈에로 분노의 불을 지르고

원망의 눈을 부라리지만

묵언하는 부처님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한다.

-「맞장」부분


아마 화두를 좇다가 막혀 절망감에 싸인 채 부처님 앞에 앉았을 것이다. 화자의 맘속에는 온갖 망상과 갈애가 들끓는다. “아무리 해도 되지 않소. 이제 어쩌겠소? 도무지 어찌해야 당신의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이요? 당신 혹시 사기꾼 아니요?” 따지듯이 묻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르는 척 딴청을 하며 빙그레 웃고 있으니 화자의 맘속에는 더욱 원망의 마음이 끓는다. 물론 부처님은 중생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묵언으로 끊임없이 가르침을 내리고 있는데 그것이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불교의 이상은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모든 수행자의 이상도 그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된다는 것이 어디 쉬운가. 수많은 수행자들이 부처를 이루려다 주저앉고 좌절했다. 로담의 결기는 먼저 부처가 된 싯달타의 앞에 버티고 앉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음과 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눈이 먼 것도 아니요

귀가 먹은 것은 더더욱 아니요

코가 막힌 것도 아닌데

진실을 찾을 수 없는

고장 난 저울

잠자는 비너스상이 되어가는 늙음

자연 도인이 되는 세상

나는 마조의 기왓장을 갈고 있다.

-「보이지 않는 길」전문


안, 이, 비, 설, 신, 의, 육근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아무리 진리를 찾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고장 난 저울”에 비유하고 있다. 잠자는 비너스상, 늙은 자연 도인, 등은 지쳐가는 수행자일까. 마지막 마조의 기왓장은 유명한 일화이다.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 듯이 수행의 과정은 끝없는 고행의 길이다. 그것은 마음 수행을 비유한 일화이다. 아무리 수행을 해도 번뇌망상은 끊이지 않는다. 시인은 마조가 기왓장을 갈 듯이 자신의 마음을 끝없이 닦고 있지만 이놈의 깨우침은 언제 도달할 지 요원하기만 한 것이다. 표제시 「뭐」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시간을 죽이지 못하고

번뇌망상으로 살렸다

바람에 꺼지지 않는 등대 불로

답답함을 꽃피웠다

스쳐가는 因과 만나지 못한 緣에

망상은 품은 꿈이 되었고

피는 꽃은 향기를 더했다

벼랑 끝에 서 있으면서도

보고 보이는 정해진 길이 아니기에

갈망으로 부딪치며 깨져 나가는 모서리

-「뭐」부분


번뇌망상, 답답함, 갈망 등의 단어들이 풍기는 뉘앙스는 무엇인가. 진리의 길을 가다보면 얼마나 많은 장애와 어려움을 만날까. 싯달타가 설산에서 고행을 할 때 그 깨우침을 방해하기 위하여 무수한 마귀와 나찰들의 협박과 유혹이 있었다. 이것은 바로 내면의 번뇌 방상들을 형상화한 것들이다. 그 번뇌와 망상의 마구니를 물리쳐야 비로소 깨우침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여 “시간을 죽이지 못하고/ 번뇌망상으로 살렸다”라는 노래가 나오는 것이다. 번뇌망상 속에서 시간은 얼마나 더디게 갈 것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수행과정에서의 갈등과 번뇌를 모두 이기고 난 다음에(이겨내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찾아오는 기쁨은 법열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로담의 시에서 그것이 마치 깨우침의 게송처럼 노래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 「삼매」를 읽어보자.


기억을 하나로

사유를 하나로

생각을 하나로


그 하나가 일여하고

일여가 여여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완연하다.


주금강도 건너뛴 점심을 먹고 나면

종일 배는 부르고

노파는 춤을 추고

꽃은 또 피고 진다

-「삼매」전문


이 시는 마치 깨우침을 이룬 고승의 게송처럼 읽힌다. 기억과 사유와 생각을 하나로 묶어보라.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수많은 생각의 가지를 하나로 묶어보라는 얘기일 것 같다. “하나가 일여하고/ 일여가 여여하면”은 모든 것이 평등하고 결국은 똑 같다는 생각과 통하지 않을까. 좌선삼매를 통하여 그런 깨우침의 경지에 이르면 노파가 시린 뼈를 흔들며 춤을 추고 꽃은 하루에도 수십 번 피고 지는 그런 환희로운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런 법열의 상태를 속인인 필자가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로담스님의 선적 경지가 이 시에서는 수승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이것이 얼마나 더 높아질까? 우리 모두 큰 마음으로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