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필름 속의 별 혹은 시
- 고석종의 시세계 -
이재복 /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고석종의 시에는 생의 단내가 배어 있다. 그의 직업은 강력팀 형사이다. 타락한 세상의 중심을 향해 온몸을 던져야 하는 직업. 그 삶이 어찌 고단하지 않으랴. 한 순간의 이완이 생과 사의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을 향해 비수가 날아드는 현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 하는 강력팀 형사의 삶이란 그 자체가 느와르 혹은 다크 필름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주윤발 식 홍콩의 뒷골목 느와르와 다른 것은 그를 향해 날아오는 칼날과 총탄이 픽션이 아니라 리얼이라는 사실이다. 주윤발 식의 느와르가 생의 구원의 형식이 될 수 없는 이 살벌하고 냉엄한 현실에서 그를 살아내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타락한 세상에 맞서는 그의 육체에서 나오는 물리적인 힘이 생의 구원의 형식일까? 아니면 강력팀 형사로 표상되는 공공의 상징 권력이 생의 구원의 형식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둘 다이면서 또한 둘 다가 아니다. 강력팀 형사에게 물리적인 힘과 상징 권력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그에게 부여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강력팀 형사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강력팀 형사이기에 앞서 시인이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시인은 다크 필름 속의 얼룩을 본다.
사이키 조명 아래 죽은 가시고기처럼 널브러져 있는 여자, 풀잎 같다. 온몸에 검자줏빛 점박이 무늬가 피어 있다. 반쯤 벌어진 입술, 코를 찌르는 냄새, 눈앞이 캄캄하다.
내 본능은 치정 쪽으로 기운다.
때가 찌든 수첩 속에 정충처럼 꿈틀거리는 전화번호들. 벌써 몇 시간째 쉬지 않고 돌아가는 CC-TV. 습관처럼 담배를 피워 물고 지친 몸을 뒤로 젖히는 순간,
나를 쳐다보는 게슴츠레한 그녀의 눈!
- 「풀잎」부분인용
한 여자의 주검의 현장에서 시인이 본 것은 자신을 쳐다보는 “게슴츠레한 그녀의 눈”이다. 그녀에 의해 시인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바라만 보는 것과는 다르다. 보여짐으로써 시인은 비로소 주검의 현장에 놓인 욕망을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여자의 욕망,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깨끗하게 지울 수 없고 또 지워지지도 않는 생의 얼룩인 것이다. 이로 인해 얼룩은 생에 난 구멍 속으로 끊임없이 출몰할 수밖에 없다. 얼룩의 출몰은 시인으로 하여금 생을 안정되고 통합적인 차원이 아닌 불안정하고 분열된 차원으로 인식하게 한다.
이 금간 생, 다시 말하면 불안한 세계에 대해 시인은 그것을 해소하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서정’의 방식이다. 서정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분열이 아닌 융화를 목적으로 한다. 이때 자아와 세계의 융화를 매개하는 질료가 깨꽃(「깨섬」), 이슬(「이슬」), 별(「별」), 풀잎(「풀잎」), 모래더미(「습벽」), 여치(「휴대폰」) 같은 자연성을 지닌 것들이다. 이 순수하고 맑은 질료들은 타락한 세계의 어둠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가령
거기 어디쯤
그녀를 앗아간 쾌락의 그림자가 있지 않을까
검붉은 생을 잇댔던
뒤틀린 끄나풀들을 쓸어 담은 부검의가
몇 땀 바느질로 그녀의 마지막 생을 봉인한다.
갈라진 혓바닥, 쇳물 섞인 단내가 난다
세상은 하나의 사체부검실이다
이곳을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죽음으로 갈 수 없다, 이슬처럼
- 「이슬」 부분 인용
에서 “쾌락의 그림자”나 “검붉은 생”, “사체부검실”의 어두운 이미지와 “이슬”의 순수하고 맑은 이미지의 대비라든가
아랫도리 벗겨진 채
차디찬 모텔 방에 누워 있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자
실잠자리처럼
포충망을 빠져나오려고
얼마나 외로운 날갯짓을 했을까
까르르, 보랏빛 웃음도 식어버린
커피 잔을 싼 보자기에서
쓰르쓰르 쓰르르르
여치가 운다,
- 「휴대폰」 전문인용
에서의 “차디찬 모텔 방”의 견고함과 “여치”의 연약함의 대비는 생의 비극성을 강하게 환기한다. 그러나 그 비극은 타락한 생의 현장을 시인으로부터 분리하고 소외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따뜻하게 감싸려는 시인의 의도가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강력팀 형사의 일상적인 시선으로 보면 “사체부검실”과 “차디찬 모텔 방”에 놓인 여인의 사체는 이미 생명을 다한 물적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 굳이 “이슬”이다 “여치”다 하여 그것을 미화하는 것은 오히려 사태 파악에 방해가 되는 감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여기에 “이슬”과 “여치”의 정서를 투사함으로써 그 비극의 현장을 자신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그를 그 비극의 현장으로부터 떠나지 못하게 한다. 시인은 “서른 세 번이나 기습을 받”고 “그때마다 칼을 맞”으면서도 자신이 이 “골목의 진정한 삼촌”(「골목삼촌의 말」)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한다. 진정한 느와르의 완결판 같은 세계를 환기하지만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리얼을 전제하기 때문에 진정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저 다크 필름 속 여인들에게 이렇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정리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그 여인들과 자신의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을 “환청의 비늘이 번뜩이는 도시에서/소금에 절여진 부표처럼/이리저리 밀리”(「깨섬」)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환청의 도시에서 환상을 좇아 헤매기는 자신과 그 여인들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떼끼”(「나는 떼끼다」)라고 까지 말한다.
시인 자신과 여인들 사이에 분명한 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늘 경계를 넘나드는 ‘겹침’이 있는 것이다. 누구나 경계에 놓이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느와르의 진정한 삼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괴로움은 감내해야 한다. 어떻게 감내할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러기에 그의 별은 창공에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지 않다. 그의 별은 오리무중이다. 마치 범인이 오리무중인 것처럼.
오늘도 집에 들어가긴 글렀다
헤집을수록 발만 푹푹 빠진다
추측만 난무하고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펀치에 뚫린 보고서
끝없이 이어진 수사회의
틀에 박힌 말들만 오갈 뿐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가슴
나는 지금 PM가 알파 426*에 있다
별아,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 「별」 전문인용
* 시인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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