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한국명시

세들어 사는 동안 / 박라연

시인 최주식 2011. 9. 8. 23:43

세들어 사는 동안  / 박라연

나.
이런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따라 걷다 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 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 뿌릴 여유가 잇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있어
나 이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 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뒷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런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처음...사랑할...때...처럼...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그 한마디 말이 되어 보겠네

 * 시집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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