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쌀 빚을 탕감해달라고 관아에 바친다(呈分司乞蠲戶米·정분사걸견호미)/정초부

시인 최주식 2012. 5. 31. 23:05

쌀 빚을 탕감해달라고 관아에 바친다(呈分司乞蠲戶米·정분사걸견호미)

 

호젓한 집을 개울가 응달에 장만하여
메추라기와 작은 숲을 나눠 가졌는데
썰렁한 부엌에는 아침밥 지을 불이 꺼졌고
쓸쓸한 방아에는 새벽 서리만 들이친다.
초가삼간에는 빈 그릇만 달랑 걸려 있고
쌀알 한 톨은 값이 만금(萬金)이나 나간다.
낙엽 쌓인 사립문에 관리가 나타나자
삽살개는 짖어대며 흰 구름 속으로 달아난다.

幽棲寄在澗之陰(유서기재간지음)
分與鷦鷯占一林(분여초료점일림)
冷落山廚朝火死(냉락산주조화사)
蕭條野確曉霜侵(소조야확효상침)
三椽小屋懸孤磬(삼연소옥현고경)
一粒長腰抵萬金(일립장요저만금)
落葉柴門官吏到(낙엽시문관리도)
仙尨走吠白雲深(선방주폐백운심)

―정초부(鄭樵夫·1714~1789)

 

가난뱅이 시인의 낭만적인 넋두리 시다. 영조 시대의 노비 시인 정초부의 초가집으로 쌀 빚을 갚으라고 아전들이 쳐들어왔다. 그에게는 갚을 쌀도 없었고 버틸 권력도 없었지만 다행히 시를 쓸 능력은 있었다. 며칠 굶은 궁상을 늘어놓아 빚을 갚을 처지가 못 됨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메추라기와 산자락을 나눠 차지했다니 그의 삶은 메추라기처럼 미약해보이고, 삽살개가 짖어대며 흰 구름 속으로 달아났다고 하니 조금만 더 몰아세우면 그도 곧 영영 인간 세상을 버릴 것만 같다. 시를 아는 관리라면 연민의 정이 들어 그냥 되돌아갔으리라. 시는 때때로 논리가 정연한 문서보다도 더 강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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