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란/이영도
아이는 책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정에
삼가한 듯 둘렸다.
―이영도(1916~1976)
오랜만에 꺼내보는 말이다. 단란, 그 말에서는 정갈한 속옷이나 따뜻한 밥상 혹은 풀 잘 먹인 옥양목 호청 같은 게 떠오른다. 그런 온기의 '단란'이 불현듯 그리워진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갈수록 적어지는 탓일까. 아니면 시끄러운 소음 불빛 속에서 전자기기를 늘 장착한 채 '심지 돋우'는 시간도 없이 사는 분주한 일상 때문일까.
어머니와 딸만으로 충분한 듯, 시 속의 저녁 한때가 퍽이나 오붓하다. 이 다사로운 모녀가정을 두고 누가 결손 운운할 수 있으랴. 이제는 가정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으니, '결손'이란 낙인도 폐기했으면 싶다. 누군가의 부재보다 중요한 것은 같이 살고 싶은 사람끼리 가정을 이루는 것. 그래야 진정한 단란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책 읽는 아이와 이마 맞댄 저녁이 잘 묵은 묵화(墨畵) 같은 단란한 정경이다. 고요한 어둠 속으로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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