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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을 넘고 아홉 개의 강을 건너
달아났지 살인자는 달아나며
원한도 떨어뜨리고
사연도 떨어뜨렸지
아홉 개의 달이 뜰 때마다 쫓던 이들은
푸른 허리를 구부려 그가 떨어뜨린 조각들을 주웠다지
조각들을 모아
새하얀 달에 비추면
빨간 양귀비꽃밭 가운데 주저앉을 듯
모두 쏟아지는 향기에 취해
그만 살인자를 잊고서
집으로 돌아갔대
(중략)
그건 정말 오래된 이야기
달빛 아래 가슴처럼 부풀어 오르며 이어지는 환한 언덕 위로
나라도,
법도, 무너진 집들도 씌어진 적 없었던 옛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세상엔 그래도 수습의 가능성이 있다. 살인은 나쁘지만, 옛날의 그곳엔 그걸 저지를 만한 ‘원한’과 ‘사연’이 있었다고 시는 말한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 아닌 것’이 사람을 죽인다고 이 시는 더 세게 말한다. 그것을 국가라 부를까, 자본이라고 부를까. 옛날의 살인자는 혼비백산 달아나야 했지만 오늘의 살인자는 그러지 않는다. 죽음의 장소를 점령하고 앉아 죽임은 없었노라고 그는 도리어 떵떵거리며 말한다. 하지만 시의 인물은 처음부터 그를 살인자로 지목하고 있지 않은가. 이 살인사건들의 가공할 메시지는 ‘죽여도 된다’가 아니었던가. 그래서일까, 시의 마지막 연은 심하게 더듬거린다. 이 더듬거림이 그녀의 진심이라고, 소리 없는 통곡의 벽 앞에 모두를 불러 세우는 걸로 말을 그치는 것이 그녀의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영광·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