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나희덕
노인도 아기도 벌거벗었다
빗줄기만 걸쳐 입은 노인의 다리가
마른 수숫대처럼 여위었다
늘어진 성기, 주름진 사타구니 아래로
비는 힘없이 흘러내리고
오래 젖을 빨지 못한 아기의 눈이
흙비에 젖어 있다
옥수수가 익으려면 아직 멀었다
연길 들판, 소나기 속으로
늙은 자연이 어린 자연을 업고 걸어가는 오후
―나희덕(1966~ )
냉방이 잘 된 방에 앉아서 이 시를 읽는다. 기름진 것을 너무 먹어 배가 불편한데도 더운 날씨라고 얼음과자를 입가심으로 더해 먹고는 뒤로 비스듬히 누워 이 시를 읽는다. 십 수만원 하는 옷을 세일가(價)로 싸게 샀다고 기뻐하며 입어본 후에 이 시를 읽는다. 헌금을 내고는 천국을 예약한 양 기뻐하며 이 시를 읽고, 복전함(福田函)에 몇 푼 넣고 편안해진 맘으로 이 시를 읽는다. 내가 밉다. 이 시를 읽고 애잔한 마음이 생기는 나도 밉고 사는 게 뭐람, 하며 다음 페이지로 얼른 넘기는 나도 밉다. 그러니까 '인류의 윤택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손쉽고 입바른 결론을 내보는 나도 참담하기만 하다.
사타구니로 고여들어 흘러내리는 소나기 빗물이여! 그 빗물의 눈동자여, 우리를 똑똑히 보아다오. 우리의 비루하고 망측한 정신을 똑바로 보아다오. 소나기 지나가고 저 아기 무지개라도 보았으면! 하는 내가 다시,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