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상의 단편, <옛 시절>
숲으로 뒤덮인 동산 위에 고풍스러운 성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큰 나무들이 그 성을 다시 검푸른 색으로 둘러싸고 있다. 정원은 끝없이 뻗어나가 멀리 있는 깊은 숲까지 닿아 있었고, 저택 정면 앞 분수대에서는 대리석 여인조각상이 놓여있다. 또한 맞은 편 구릉 밑까지 층계를 이루며 연이어 있는 연못들 사이사이에는, 각 연못에서 치솟는 샘물이 폭포를 이루고 있다.
옛적 멋진 여인처럼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는 저택으로부터, 흘러간 세기의 사랑들이 잠들어 있고 여기저기 조개껍질들이 박혀있는 동굴에 이르기까지, 이 고성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옛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모든 것들이 아직도, 옛날의 관습과 풍속, 가벼운 사랑들, 우리의 할머니들이 한껏 부리던 경박한 멋들이 증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이 XIV세 시절 풍으로 장식된 작은 거실 안에는 꿈지럭거리지만 않는다면 영락없이 시체로 보일 늙은 여인이 커다란 소파위에 비스듬히 누워,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을 양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그녀의 흐릿한 시선은 먼 전원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젊은 날의 정경을 뒤쫓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풀냄새와 꽃향기가 미풍에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미풍은 주름진 늙은 여인의 이마에 흰 머리카락 몇 가닥을 흩어놓으면서 동시에 추억들을 그녀의 뇌리에서 나부끼게 해주었다.
그녀의 곁에는, 긴 금발을 땋아 등 뒤로 늘어뜨린 처녀 하나가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처녀의 눈은 몽상에 젖어 있는데, 손가락들은 날렵하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그녀의 몽상은 계속된다.
바로 그때, 할머니가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꿈을 깨운다.
“베르트, 나에게 신문을 좀 읽어다오. 나도, 이승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아직은 가끔이나마 알고 싶구나.”
처녀가 신문을 집어 들고 훑어본다.
“할머니, 정치이야기 투성이네요. 그냥 넘어갈까요?”
“그래, 그래. 귀여운 것! 사랑 이야기는 없느냐? 옛날처럼, 납치사건이라든가 기타 치정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으니, 프랑스에서 사랑놀음이라는 것이 자취를 감춘 모양이로구나.”
처녀 아이가 신문을 한동안 구석구석 살핀다. 그러더니 반가운 듯 소리친다.
“하나 찾았어요! ‘사랑이 빚은 참극’리라는 제목이에요.”
늙은 여인의 주름살에 잔잔한 미소가 어린다.
“그걸 좀 읽어주렴.”
베르트가 기사를 읽기 시작하였다. 황산염 사건이었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어떤 여인이 남편의 정부에게 황산염을 뿌려 눈과 얼굴을 태워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 여인은 몰려든 군중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재판장을 떠났다고 했다.
할머니는 소파에 누운 채 불편한 심기를 억제하지 못했다.
“끔찍한 일이야. 정말 끔찍한 일이야! 아가야, 그러니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렴.”
베르트가 다시 한동안 꼼꼼히 살폈다. 이윽고, 역시 법정 소식란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내었다. ‘음울한 참극’이라는 제목이었다. 상점에서 일하는 성숙한 처녀가 어느 젊은이와 사랑에 빠졌었는데, 바람기 있는 연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에게 권총 한발을 쏘았다는 이야기였다. 가엾은 청년은 평생 불구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 했다. 도덕심 투철한 배심원들은 살인미수자의 비합법적인 사랑을 편들어, 그녀를 무죄 석방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이번에는 늙은 할머니가 노골적으로 반발하며 떨리는 음성을 말했다.
“도대체 모두들 미쳤구나, 미쳤어! 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주셨고, 그것이 삶의 유일한 매력이야. 그 사랑에다 우리 인간이 사랑놀음을 가미했으며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도락이야. 그런데 그것들에다가 황산염과 권총을 섞다니! 스페인 고급 포도주에다 진흙을 쑤셔 넣는 격이야!”
베르트는 할머니가 분개하시는 연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할머니, 그 부인은 복수를 한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할머니. 그녀는 결혼한 몸인데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요.”
손녀의 그 말에 할머니가 심하게 동요했다.
“도대체 오늘날에는 우리의 젊은 처녀들에게 무슨 생각들을 심어주고 있단 말이냐?”
“하지만 결혼이란 신성한 것이에요, 할머니!”
손녀의 그 말에 할머니의 가슴 속에서는 전율이 일었다. 사랑이 자유롭던, 위대한 세기에 태어난 여인의 가슴이다.
“신성한 것은 사랑이야. 귀여운 아가씨, 내 말을 들어보아라. 세대가 세 번 바뀌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리하여 남자들과 여자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 늙은 할미의 말을 잘 들어보려무나. 결혼과 사랑이란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거란다. 가정을 꾸리기 위하여 결혼을 하는 것이며, 사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이야. 결혼이라는 것이 없으며 사회가 지탱하지 못한다. 사회가 하나의 사슬이라면, 가정이란 그것을 형성하는 고리란다. 그 고리들을 든든히 용접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항상 유사한 금속을 찾는 것이지. 결혼을 하려면, 타산이 서로 맞아 떨어져야 하고, 양측의 재산과 운수를 융합시켜야 하며, 비슷한 족속들끼리 결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동의 이익이란 재산과 자식들이란다. 결혼은 오직 한 번만 하지. 사람들이 그러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평생 스무 번도 한다. 자연이 우리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야. 너도 알다시피 결혼은 하나의 율법이다. 반면, 사랑은 우리들을 이리저리 멋대로 끌고 다니는 본능이다. 우리들의 본능에 항쟁하는 율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능이 언제나 승리를 거두지. 또한 본능에 너무 저항해서도 아니 된다. 본능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에 반해, 율법이란 기껏 인간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야. 어린애들이 먹는 약에 설탕을 가미하듯, 사랑으로, 가능한 최대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향기롭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삶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베르트는 질겁한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 할머니, 할머니 사람은 오직 한 번밖에 사랑할 수 없어요!”
할머니는, 이미 죽어버린 신, 자유분방한 사랑의 신에게 호소하려는 듯, 떨리는 두 손을 하늘로 추켜올렸다. 그리고는 분개하듯 언성을 높였다.
“모두들 천민으로, 아니 하인들 족속으로 전락했어. 불란서혁명이후 세상은 뭐가 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어. 모든 행동을 어마어마한 말로 과장하는가 하면, 삶의 구석구석에 권태로운 의무들을 배치해놓았어. 그리하여 너희들은 평등과 영원한 정염을 신봉하지? 어떤 자들은 사랑 때문에 죽어간다는 시구들을 읊조리고 있어. 그러나 이 할미 시절에는 모든 여인을 사랑하라고 남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시를 지었단다. 그리고 우리 여인들은…. 어떤 신시가 우리 맘에 들면, 시동을 그에게 보냈지. 또한 우리의 가슴 속에 변덕이 일어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면, 즉시 먼젓남자를 해방시켜 주었지… 물론 두 남자를 모두 간수하고 싶지 않을 경우에….”
늙은 여인은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는 일종의 장난기가 번득였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믿으며 항상 지배자로 살아왔고, 보통 사람들의 신조가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기지 넘치고 회의적인 장난기였다.
처녀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여인들에게는 명예라는 것도 없었겠네요.”
할머니의 미소가 문득 멈추었다. 그녀에게는 볼테르의 빈정거림 같은 것이 남아있으면서도, 동시에 루소의 불길 같은 철학이 가미되어 있었다.
“명예가 없었다고! 사랑하고,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해주고, 나아가 그 사랑을 자랑했다고 해서? 하지만 귀여운 아가씨, 프랑스에서 가장 지체 높은 우리 귀부인들 중 하나가 혹시 연인을 두지 못하였다면 그 여인은 온 궁정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거예요. 다른 식으로 살기를 원하는 여인은 수녀원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단다. 요즘의 처녀들은 남편이 평생 자기만을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치 그것이 진정 가능한 일인 듯. 하지만 이 할미가 분명히 말해주마. 결혼이라는 것이 사회의 존속에 필요한 것들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이 네 할미와 같은 사람들의 천성에는 낯선 것이다. 알아듣겠니?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 좋은 것은 오직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가뜨려서, 종교의식처럼 엄숙한 것으로만, 또는 옷처럼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으로 변질시켰어.”
처녀는 떨리는 손으로 할머니의 주름투성이 손을 덥석 잡았다.
“할머니, 제발, 이제 그만하세요.”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글썽이며, 위대한 사랑을, 근대 시인들이 꿈꾸던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을 허락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그러자 경쾌한 철학자들이 18세기의 역사 위에 뿌려놓은, 그 매력적이고 건강한 양식으로 무장된 할머니가, 손녀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조심해라, 가엾은 아가, 네가 만약 그따위 미친 소리들을 믿는다면, 너는 큰 불행에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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