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필화(革筆畵)를 보며 이민아
맞춤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순서에 놓인 아버지 이름 석자,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풀어내는
혁화쟁이의 은밀한 내간체가 설화처럼 피어나고, 환하게
어룽거리는 혁필화 한 장으로 남은 아버지, 두 손 가득 펄럭이는데
네모난 비단천 속, 피뢰침같은 철심이 박힌 지문의 파원(波圓) 위로
바스락, 굴참나무 거친 수피가 뗏목처럼 흐르다 멎고
저만큼 달아난 행서체 굴곡 따라 범람하는 푸른 바다,
서늘한 그늘 겹겹 장마 속에 깃들어 계신 아버지 용오름을 하며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정자체로 양각한 옥돌전각을 아버지의 혁화와 번갈아 보며,
온전히 다 타버린 참숯처럼 더 이상 사그라들 것도 없던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장난감 블럭을 쌓아 안으로만 숨어들던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문득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전각 틀이 비좁다, 여기
가난의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비로소 마주 앉은
탁란(托卵)의 깊은 둥지, 수척한 아버지 긴꼬리태양새 되어
끝없는 비단길 위로 날아가는 에움길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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