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론(詩評論)

신경림-갈대 해설

시인 최주식 2012. 8. 28. 21:07

신경림-갈대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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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문학 특히 시의 창작 과정에는 시인의 상상력이 중요하게 작용하여, 문학의 형상적 완성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즉 시인이 자연이나 세계, 현실의 등의 용어로 정리할 수 있는 대상을 인식하고, 이를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시인의 창조적 상상력이 작용하고, 그것은 직관적이며 초월적인 계기를 통하여 작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인의 기억이나 경험, 관념 등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시는 시인의 기억과 경험 속에 있던 자연 대상인 '갈대'가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먼저 이 시는 의인화(擬人化)된 '갈대'를 통하여 우리 인간들이 흔들림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파스칼(B. Pascal)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연상시키는 1연은, 자연 대상인 갈대가 인간의 삶과 관계를 맺는 자리, 즉 시인의 경험과 시인의 인식이 조우(遭遇)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인식의 대상인 자연이 의인화되면서 인식의 주체인 인간과 합일되고 있다.

2연에서 흔들림은 '울음'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슬픔을 간직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런 슬픔은 바람이나 달빛과 같은 타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갈대' 자신이 잉태하고 있는 슬픔이다. 그러나 정작 흔들고, 흔들리는 자신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려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적 형상화 과정을 통하여 시인은 결국 인간 삶의 진실과 진리를 자각하는 존재, 즉 생각하는,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갈대)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결국 이 시에서는 시인이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자연 현상을 보며, 흔들림과 소리를 만나고, 이를 슬픔을 간직하는 존재라는 인간의 삶과 결부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때 '그'라고 표현된 갈대는 이미 자연 대상 그대로가 아니라 인간 또은 시인으로 전이되며, 이 과정에 시인의 창조적 형상화 능력인 시적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울러 서정시의 표현 방식인 선경 후정(先景後情)을 활용하여 물아 일체의 시적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시인이 이 시의 창작 과정을 밝힌 진술을 보면, 이런 시적 형상화 과정 또는 시적 상상력의 작동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내 고향 마을 뒤에는 보련산이라는 해발 8백여 미터의 산이 있다. 나는 어려서 나무꾼을 쫓아 몇 번 그 꼭대기까지 오른 적이 있다.
산정은 몇만 평이나 됨직한 널따란 고원이었다. 그 고원은 내 키를 훨씬 넘는 갈대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에 갈대들은 온몸을 떨며 울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갈대들의 울음에서 나는 사람이 사는 일의 설움 같은 것을 느끼곤 했었다.
이 「갈대」는 이 때의 산정 고원에서의 느낌을 시로 옮긴 것이다. 대학 2학년 때였다. 이 시를 쓰면서 나는 먼저 일체의 사실적인 서술을 피했다. 가파른 벼랑 밑에 흘러가는 새파란 강물, 멀리 굴참나무 밑에서 우는 뻐꾸기, 갈대밭에서 모여 우는 산바람, 고원을 뒤덮은 달빛(이것은 상상했을 뿐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느다란 한 줄기 갈대 속에 집어넣는다는 생각으로 이 시를 썼다.

이 진술에 비추어 앞의 시를 보면, 시인의 경험과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은 '사실적인 서술'로, 구체적인 시적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적 서술보다는 시인이 간직하고 있던 고향의 '갈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실적인 내용 서술보다는 언어적 상상으로 재창조되고 있으며, 이렇게 재구성된 시적 공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내고 있다. 그래서 시에 나타난 '갈대'는 시인이 어렸을 때 본 자연 대상이 아니라, 시를 쓰는 순간에 시인이 새롭게 인식하게 된 대상으로 전이되고 있다.
여기서 자연물인 '갈대'에 대한 시인의 '생각'과 '느낌'은 인식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의미 부여이며, 곧 시적 상상력이 작동한 결과의 산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슬픔을 간직한 나약한 존재라는 점과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고 있으며, 이를 시적으로 표현하여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특히 일상적이고 쉽고 평범한 언어와 화려하지 않은 수사를 통하여, 이것이 자명한 진리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창작 과정에서 상상력은 시인인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고, 이를 언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정신 능력이다. 따라서 자연이나 세계, 사회, 현실 등의 시적 표현 대상을 언어적으로 전이하는 능력이 곧 문학적(시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들이 대상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상상력이나 공상, 망상 등과 구별된다. 이 때 시의 형상성은 상상력의 깊이뿐만 아니라, 이를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는 인간의 언어 능력과 만나게 되며, 이런 만남이 조화를 이루어야 가치 있는 문학적 형상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된다. (윤여탁외, 시와 함께 배우는 시론, 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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