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산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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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伽倻山)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梅花) 봉우리
눈 맞는
해인사(海印寺)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微笑)가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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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서정시, 예컨대 김소월이나 신석정, 박목월 같은 시인들의 작품에만 어느 정도 익숙해 있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다소 난해하여 보인다. 그 수법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가 취한 방법 자체는 비교적 간단한 것이다.
이 작품은 논리적으로 관계가 희박하여 보이는 몇 개의 경험을 연결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을 나누어 보면, `한여름에 듣던 가야산의 독경 소리 / 철 늦게 내리는 눈 / 매화 봉오리 / 눈 내리는 해인사 열 두 암자 / 벽을 향해 앉아 수도하는 노승의 미소'와 같이 된다. 이 여러 사물과 풍경들 사이에는 간단히 그 관계를 서술하는 구절들이 있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를 연결해 주는 분명한 인과 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일과 인과 관계의 설명이라는 뜻으로만 생각하는 경우 이 작품은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접근 방법보다 하나 하나의 사물, 이미지를 음미하면서 그것들이 연상적 관계 속에서 저절로 어울리도록 하는 일이다. 그렇게 볼 때 작품 전체에는 어떤 분위기의 통일성 같은 것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작품을 다시 더듬어 보자.
현재의 작중 상황은 겨울, 해인사의 암자가 있는 어느 산 속이다. 철 늦게 푸근한 눈이 내리고, 그 속에서 매화 봉오리가 막 피어나려 하고 있다. 여기서 작중 인물은 갑자기 언젠가 들었던 가야산에서의 독경 소리를 연상한다. 그러나 지금은 눈 내린 한겨울, 암자에서 오래도록 벽을 향하여 마주앉아 수도하던 노승의 눈매에 미소가 어린다. 어떤 그윽한 진리를 깨친 때문일까? 밖에는 눈이 희게 내려 있고, 그 서늘한 빛깔 사이에서 매화 봉오리가 보인다.
이것뿐이다. 이 이상의 설명은 작품 속에 없고, 시인 자신이 처음부터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시인은 이런 몇 개의 인상으로 이루어진 분위기와 서늘한 감각을 독자 스스로가 느껴 보기를 바라고 있다. (김흥규, 한국현대시를 찾아서, 푸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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