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지에밥/박기섭
가을은 해년마다 돗바늘을 들고 와서
촘촘히 한 땀 한 땀 온 들녘을 누벼 간다
봇물이 위뜸 아래뜸 고요를 먹이고 있다
절인 고등어 같은 하오의 시간 끝에
하늘은 또 하늘대로 지에밥을 지어 놓고
수척한 콩밭 둔덕에 두레상을 놓는다
―박기섭(1954~ )
태풍 뒤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피해엔 시침 뚝 떼듯, 바람과 햇살이 청량하기 그지없다. 금햇살을 받아든 들녘은 곡식이며 과일 익히기에 분주하다. 물기 걷힌 벼이삭들도 고슬고슬 익어가며 저마다 지에밥을 지어낸다. 지에밥은 물에 불린 쌀을 시루에 찐 고두밥으로, 술이나 감주를 빚을 때도 짓곤 했다. 갓 쪄낸 지에밥을 조금씩 베어 먹을 때의 고소하고 고슬한 맛이 이맘때면 더 생각난다.
한가위 고향으로 가는 길목마다 가을 지에밥이 한창이겠다. 금물결 넘실대는 가을 들판보다 풍요로운 게 또 있으랴. 우리네 밥심의 근원인 저 들판―. 아무리 고되고 지쳐도 힘을 낼 수 있는 건 그런 섭리를 받아 키우는 농심(農心), 땅심 덕분이다. 고향길에도 힘내라고 금빛 지에밥이 여기저기 한 시루씩 훈훈하게 지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 금빛 훈김이 고루 스미는 넉넉한 한가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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