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옹관(甕棺) 1/정끝별

시인 최주식 2012. 11. 30. 22:45

옹관(甕棺) 1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를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둥근 길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내 안에 길이 있다
내가 가득 찬 항아리다

―정끝별(1964~ )

빈 항아리 하나를 뉘였더니 거기에서 길이 하나 흘러나온다. 해가 나오고 별이 떠올라 흐른다. 흙이 나오고 흙 위에 길이 열린다. 거기 꽃잎이 뜨겁게 열리고 잠긴다. 그 꽃잎은 한 생명의 매듭이 되고 덫이 되었다가 빛나는 아이가 된다. 아이는 다시 항아리가 되고 어미가 되어 찾아오는 길마다 둥그런 숨을 불어넣는다.

어머니는 항아리다. 우리는 그 항아리에서 나와 그 항아리로 돌아간다. 항아리에 물이 가득하면 그렁그렁하고 항아리에 바람이 스치면 노랫소리를 낸다. 가득참과 텅빔 사이에 그 어떤 것도 없는 어머니. 노래와 기도를 빼면 아무것도 없는 항아리. 노래와 기도로 허리와 등이 구부러져 둥그렇게 말린 항아리. 달빛 아래 오래 항아리를 바라본다. 나를 자꾸만 부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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