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찜/차영미
이른 아침 계란찜을 한다
뚝배기에 계란 다섯 개,
새우젓, 설탕, 소금, 깨, 쪽파 송송 썰어
휘휘 저어놓고
잠시 한눈팔다
바닥에 쏟아졌다
망망한 눈빛으로 서 있는 사이
얼른 나온 남편이 나온다
바다로 못 간 새우를 열심히 찾고
익어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찐득하게 누워버린 계란들
열심히 닦아낸다.
미안해, 사고는 내가 치고 수습은 당신이 하네
넓은 집에 살면 괜찮을 텐데 주방이 좁아서 그런걸, 뭐
이런 날 아침엔
어제의 잔소리도
말다툼도
다 고맙고 괜찮다
호수보다 넓은 마음의 집에 사는 나는
쪽파 송송 썰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계란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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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소리/최관호
머리 벗겨질 듯 뜨거운 뙤약볕 아래
따비로 일군 산비탈 밭
싸리나무 얼개에 기름종이 씌워 가꾸던
긴 가뭄에 시들어가는 참외밭
저 아래 방죽 물 길어다
목 타는 참외 구덩이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던 땀에 젖은 몸
물지게 멜 방에 짓눌려 빨개진 어깨
가쁜 숨 몰아쉬며 산 아래서 불어오는 골바람에
가슴 풀어 적시며
한없이 부러웠던 건달 새
오늘 아침
비봉산 자락에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에
머 언 그날의 추억이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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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사에서/이루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
찡그리며 말하면서도 얼굴 붉히시는 당신
거기 있어 주어서 고마워요
하늘 빛 담아 곱게 물든 산자락도
계곡의 쉼 없는 노래
아낌없이 들려주시니
한참을 앉아 있어도 지겹지 않아요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가게 만드시는 당신
부끄러움 깊이 반성하고 마음을 쓸어 담아요.
물 안도 물 밖에도 당신이 있어 주심에
오늘도 착하게 살아야지 생각해요
마음줄 잡아당겨 당신손길 머문 그 곳에
휘휘 내저어 행궈 놓고
가슴 속 염증도 죄다 짜 피고름 버렸어요.
얼마나 갈까요
장담은 못 하지만 버리고 싶을 때 마다
찾아올게요
무거운 머리 내려놓고 싶을 때
당신이 안아 주셔요.
가슴속에서 젖은 숨 쉴 수 있도록
제 자리 늘 비워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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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왔어요, 어머니 / 연선화
저 왔어요, 어머니
어머니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육순을 훌쩍 넘긴 늙은 아들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명주실처럼 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니
뽀얀 낯빛에 화색이 돈다
어머니, 어머니 눈 좀 떠보세요
어머니 좋아하시는 홍시 사왔어요
눈꺼풀이 무겁게 들리더니
눈으로 한입 베어 물고 이내 잠든 어머니
임자 없는 방에 홍시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저 왔어요, 어머니!
불러도 대답 없네, 이제 가면 언제 오시려나
열아홉 새색시의 꽃가마 길을
구순의 노모가 꽃상여를 타고 가네
"어허! 어허하! 어거리 넘차! 너화너!"
"어허! 어허하! 어거리 넘차, 너화너!"
선소리꾼의 요령 소리 처연히 북망산을 넘나드니
어찌합니까 야속한 세월의 강을
산모퉁이 돌아 꽃상여는 떠나가네
늙은 아들도 길섶의 꽃들도 신내천 개울도
목놓아 슬피 우니 "어허! 어허하! 어거리 넘차, 너화너!" 소리 내며
꽃상여는 떠나가네
저 왔어요
아, 저 왔어요 어머니, 울 어머니 불러도 대답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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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편지/김현희
이른 새벽
창틀에 매달린 바람소리
알람 삼아 짧은 편지를 씁니다
켜켜이 쌓인 별들이 무수히
내리던 밤엔 차마 마음을
전할 수 없어 두툼한 이불
끌어 당겨 그냥 잠을 청했습니다
새벽 신문을 들추다가 세상살이가
다 이런 것이려니 역정으로
달라질 수 없는 하루를 곱게
꾸며야겠다 생각 합니다
시월이 가면 가을도 가겠지요
가을이 가면 창틀에 매달린 바람은
더 거세게 저항 할 것이고
무수하게 내리던 별들은
자꾸만, 자꾸만 숨어들겠지요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처럼
완숙한 가을
지금은 벌써 시월 말로 치닫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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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사랑/곽기영
바닷가 항구엔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두 개의 등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붉은 장미꽃 같은 사랑이고
또 하나는
순백의 백합꽃 같은 사랑입니다.
두 사랑은
단 한 번도
체온을 느껴 보지 못하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밝은 낮에는
눈이 시리도록 쳐다보며
눈빛만으로 사랑을 전하고
까만 밤에는
서로 불빛만 깜빡이며
사랑을 속삭이고
비 오는 날이면
이룰 수 없는 사랑에
하염없이 흐느낍니다.
간혹,
항구를 오가는 배와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가
이들의 기나긴 침묵을 깨뜨리고
파도와 갈매기만이
아픈 사랑을
달래 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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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삼덩굴/민기준
암 수 딴 그루
네발나비의 보금자리
억세고 질긴 팔
태양의 끈을 향해 매달리고
무서울 것 없이 거친 손을 뻗는다.
줄기에 붙어있는 잔가시
휘감아 말리고 서식지를 빼앗지만
누군가를 위해 숲 가장자리를 지키며
독을 풀어주는 약초로 가난한 이들의 손을 잡는다.
때로는 뜯어지고
제초제 뿌린 누렇게 마른 도랑에 누워도
해 뜨고 비 한번 오면
틈새로 피어나는 초록빛 환삼덩굴
부러질 듯 긴팔 가늘게 내밀고
흔들리는 바람을 간신히 붙잡으며
살짝 얼굴 내밀어 이 땅의 주인들을 부른다.
가끔 찾아오면 여기저기 덮어버린
울퉁불퉁 팔뚝들이 서로 어깨를 휘감고
삐져나온 털들을 곤두세우며
태초부터 이어진 끈으로 들판을 하나씩 감싼다.
끊어버리는 칼날에 산산이 부서져도
어김없이 붙어버리는 생존력
찬 서리 내리면 땅속으로 몸을 파묻고
돌아올 시간을 가슴에 품은 채
잡초의 이름으로 얼굴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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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복 받을꺼여/유성녀
차가운 안개는 집으로 돌아 갈 채비를
하루를 시작할 태양은 주섬주섬 나올 준비를
뭔지 모를 여유로움을 가득안고 눈을 떴다
방마다 새벽과 맞서 싸우는 힘찬 숨소리들
깨알 같은 행복이 함께 딸랑거린다
잠에서 깬 욕정
애무의 상대가 두툼한 살집의 사내가 아니여도
오르가즘은 오고 있었다
어젯밤 동침시켜 놓은 배추들이 사랑스럽다
기운 빠진 노오란 속 살
자그마한 손은 야무지게 정성을 다한다
하늘 없는 곳에서 별을 보고서야 끝을 냈다
옴 몸이 빨갛게 달아오른 배추
아직 남아 있는 여운을 곰삭힐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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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김길언
한 아름 백합송이
희디흰 그리움에 가득 담아
내 품에 안겨주고 떠난 사람들
시간이 흐를수록 진하게 그려지며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들
흩어진 세월 속에
마음에 넣고 다니다 꺼내보는
가난했던 시절 가까이 서 있던
해맑고 웃음 띈 얼굴들
눈웃음치며 봄볕 사이로 살며시 내려와
내 거친 손을 잡았던 사람들
눈 감고 지난날로 돌아가면
비 온 뒤
죽순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그리움
바람을 타고 와 내 몸을 휘감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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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도 죽을 때엔 자기가 태어난 곳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린다고 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는 말이 있다. 이것도 귀소본능을 말해 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 하겠다.
예부터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
입신(立身)과 출세(出世)를 위해 고향을 떠나 객지(客地)로 나가서 살면서도 늘 고향을 잊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언제인지 손꼽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고향은 흙길과 풀섶의 바람이 한데 엉킨 영원한 향수 인지도 모른다.
소중하고 고운 추억들이 물속에 잠겨 버렸다. 이젠 흐릿한 기억 속에서만 자리하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다.
이명렬 수필가의 <그리운 내 고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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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오양임
풍요의 찌꺼기를 줍다 떠난
남편의 손수레를 끌며
남루한 겨울을 가는 등 굽은 할미
발갛게 닳은 콧잔등 아래
끌고 끌리며
굴러가는 모지랑이 바퀴는
고물상에 고단한 삶을 내려놓곤 하였다
시린 바람은 돌고 돌아
무르팍 속으로 기어들고
긴긴 세월 속에 쭉정이만 남아도
지친 몸을 녹이던 모심慕心
대지의 살갗마저 얼어붙은
섣달 그믐밤
몇 푼의 돈을 자리 밑에 깔고
할미는 눈과 귀를 문밖에 두었다
행여 어머니! 하고 들어올 것 만 같아
뜬눈으로 지새는데
몽니 바람만 창문을 두드리고
소리없이 할미의 등뼈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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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김 희
침묵의 시간 고요한 호흡으로
세상의 문을 여는 태양의 부름에
아무 대답 없는 잔잔한 호숫가
한가로이 물새를 따라 굽이쳐 흐르고
공간과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공허
무상한 마침표 위로 침묵하는 바람이 된다.
허공 가득히 뜨거운 열정을 내뿜으며
밀물과 썰물처럼 마음을 다독여
내 몸에 모든 것을 내놓고 들여 놓으니
해넘이 물빛에 굵은 파문을 그리는 나이테
동녘 하늘 노을을 품고 여린 달빛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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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 김성희
커다란 함성을 쏟아내는 것처럼
함박눈이 마구 쏟아진다
그 설렘의 함성 속으로
내 마음 달려나간다
추억 위에도 수북이 내려 쌓여서
온통 순백의 세상을 만드는
이 엄청난 함박눈
두근거리는 그리움을 싣고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이
순식간에 길들을 지우고 있다
언제나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늘 걱정거리로만 열려 있는 골목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삶이라고 이름 한
어둑한 의식의 길들도 하얗게 지우며
흩날리는 저 순수의 함성
마침내 그대가 저 눈속을 헤치며 달려온다
마침내 우리가 그 순백의 기쁨 속을
함께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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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골 마당에는 / 최현정
수많은 발자국이 머물다간 그 곳에 하루가 저물면
청청한 송림 사이 소리 깊은 밤길이 열리고
누군가 벗어 놓았던 탈피의 흔적들이
수런수런 넋두리 풀어 엮어 탑돌이 한다
미여지게 슬퍼서 타박 거리고
기척이라도 들려주길 기다리며 타박 거리고
동티가 나도록 타박,타박,
감춰진 속살 보일세라 쉴새없이
꿰메 붙이고 또 붙이며 돌고 돈다
밉살스런 근심 훨신 전에 버릴것을
묵묵부답 석축은 말이 없다
그래도 못다한 이야기
분홍빛 새살되어 도돌도돌 돋는 밤
휘영청 밝은 달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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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이복규
바람 머물지 않는
사랑 있는가
너에게로 가는 길
흔들림은 종유석(鐘乳石)처럼 울고
눈물은 석순(石筍)으로 자란다
보고 있어도 갈 수 없는 거리
홀로 걸어도 외롭지 않은 길
마음은 바람같은 나무
흔들리며 더 깊이 서고
스스로 끝을 찾아 헤매는
동굴(洞窟)은 바람의 무덤
석주(石柱)에 스미어 기댄다
너에게로
사랑 없이 잠드는
바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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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짝문/유제근
빽빽이 둘러친 나뭇가지 성
뺑 둘려 띠를 두르고
비스듬히 자빠진 삽짝문새로
초가지붕이 들여다 보인다.
이름모를 버섯들 여기저기 솟았고
마당쓸던 할멈 쪼그리고 앉아
꼬리흔든 누렁이를 쓰다듬는다
울타리 타고 넘는 수세미 넝쿨
삽짝문 설주에 꽃을 피웠네
이웃집 할멈, 삽짝문 들어설 때
할멈과 같이 졸던 누렁이가
제 밥값 한답시고 짖어댄다
멍 멍 멍!
비스듬히 자빠진 삽짝문을
지나가는 쐑 바람이 살짝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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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둘 / 최주식
텔레비젼 앞에 누워
이리저리 채널 돌려대는 내게
알토란 같은 딸 둘이
흰 머리카락 있어 나이 들어보인다며
검정 염색을 하여주네
생일 날
나이 수 만큼 촛불 꽂아
축하 노래 부르며
선물까지 주니
이보다 더 큰 잔치가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는가
이래서 자식 낳고 사는구나
이게 사람 사는 재미구나 하고
곱게 자란 딸 껴안아 보면서
어느 좋은 날 속 꽉 찬 짝에게
팔짱 풀어 보내는 일
무사히 마치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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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월/주해숙
꼭 이만큼의 설렘으로
기억의 조각을 찾아나선
한 아이가 있었지
뛰놀던 집과 마당은
움츠려 있고
세 갈래 갈림길에
서 있던 키 작은 느티나무
지친 나그네 한시름 쉬어가는
상흔 가득한 모습인데
골진 자국마다 고인 눈물
낯선 모습으로 빙그레 웃는다
낯익은 잎새하나
어깨 위에 떨어져 반갑게 맞이할 때
그 아이는
훌쩍 떠나버리고 없다
잃어버린 세월에 젖은 울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짜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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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풀장/윤송석
내 가슴속에는
당신을 위한 풀장이 있어요.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아세요.
한들한들 춤추는 해초 위에
은빛 물고기가 노닐고 있어요.
널따란 풀에선
고래가 점핑도 하고
태풍이 불거나
아무리 파도가 높더라도
변함없는 큰 풀장입니다.
당신이 다이빙하시면
밑창이 닿지 않도록
물을 가득 채워 드릴게요.
내 가슴속의 넓고 깊은 풀에서
마음껏 즐기세요, 안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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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 / 윤덕규
장벽처럼 두꺼운 단절의 시간 넘어
어느새,
가벼운 깃털 바람 타고 나부낀다
바람과 볕의 하모니로
답답한 가슴,
짓눌린 무게 걷어내니
그 속엔 아름다운 노래가 있었다
귀를 열어 팽창의 소리를 듣는다
간지러운 소리 달팽이관 타고
가슴에서 공명의 울림으로 메아리친다
웅크린 마음
기지개 한 번 크게 켜면
닫혔던 문 활짝 열리고
문밖에선 우주가 환한 미소를 보낸다
한걸음 나서면
푹신한 발밑의 감촉
걸음 소리마저 사르르 녹는다
멀리서 올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건만
그 손님 벌써 와 문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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