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필을 깎으며
손 안에 느껴지는
나무의 곧은 힘
새 연필을 깎는다
한 뼘 길이가
몽당이 될 때까지
우리는 함께다
분수의 곱셈, 나눗셈
같이 풀고
신라, 고구려, 백제
조상님을 함께 만나자
밀림 울창한 아프리카는
내일 가고
천왕성 명왕성은
다음 날 가자
새 연필을 깎으면
가슴이 뛴다
―이혜영(1957~ )
어린 시절에 연필을 사서 깎아 필통 속에 가지런히 넣어두면 마음이 참 뿌듯했다. 가방을 메고 가면 필통 속에서 딸그락거리던 연필 소리도 듣기 좋았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콧등에 송송송 땀방울이 맺히도록 글씨를 쓰고 문제를 풀던 즐거운 기억이 떠오른다. 연필은 분수의 곱셈 나눗셈도 같이 풀고, 신라 고구려 백제 조상님도 함께 만나던 단짝 친구였다. 그리고 밀림 울창한 아프리카에도 같이 가고 천왕성 명왕성도 함께 가던 꿈의 친구였다.
이 동시를 읽으면서 한 뼘 길이가 몽당이 될 때까지 함께할 연필을 사고 싶어진다. 한 해가 저무는 때에 다 닳은 몽당연필 대신 희망과 꿈이 담긴 새 연필을 사서 깎으며 나무처럼 곧게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새 꿈을 꾸고 싶어진다.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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