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나는 늙으려고/조창환

시인 최주식 2012. 12. 23. 22:57

나는 늙으려고

나는 늙으려고 이 세상 끝까지 왔나보다
북두칠성이 물가에 내려와 발을 적시는
호수, 적막하고 고즈넉한 물에 비친 달은
붉게 늙었다 저 괴물 같은 아름다운 달
뒤로 부옇게 흐린 빛은 오로라인가
이 궁벽한 모텔에서 아직 다하지 않은 참회의
말 생각하며 한밤을 깨어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어디론가 사라질
삶, 징그러운 얼굴들 뿌리치려 밤 새
몸 흔드는 나뭇잎들, 아주 흐리게 보이는
소리 사이로 눈발 같은 미련 섞여 있어
눈물겹다 세상의 길이란 길
끝에서는, 삭은 두엄 냄새 같은, 편안한
잠 만날 줄 알았건만 아직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저 기막힌 그리움
벗어 놓는단 말인가 부끄러운 나이 잊고
한밤을 여기서 늙어 머리 하얗게 세도록
바라본다 허망한 이승의 목숨 하나가
몸 반쯤 가린 바람 사이로 흔들리는 것을

―조창환(1945~ )

세모(歲暮)에 가깝다. 하나의 나이테를 겹쳐 두르는 쓸쓸함이 내 뒤의 긴 그림자를 더욱 무겁게 한다. 무엇을 했단 말인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헛것으로 살았단 말인가?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누구인가를 간절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헛것으로 산 것이다. 또 한 해가 저문다는 사실만으로도 '북두칠성이 내려와 호수에 발을 적시는' 풍경 앞에 서 있게 하는데 하물며 일생의 저물녘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모습은 '징그러운 얼굴들 뿌리치려 밤 새 몸 흔드는 나뭇잎들'같다. 그러나 그 '징그러운'은 실은 '그리운'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운 얼굴들을 어떻게 뿌리칠 것인가. 노경(老境)의 가장 큰 과업 중 하나일 것이다. 아쉬움과 후회를 삼키는 세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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