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도리- 문성해(1963~ )

신생아들은 보통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대신 기저귀를 채워 놓는다
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했을 때도
아랫도리는 벗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랬다
아기처럼 조그마해져선 기저귀 하나만 달랑 차고 계셨다
사랑할 때도 아랫도리는 벗어야 한다
배설이 실제적이듯이
삶이 실전에 돌입할 때는 다 아랫도리를 벗어야 된다
때문에 위대한 동화 작가도
아랫도리가 물고기인 인어를 생각해 내었는지 모른다
거리에 아랫도리를 가린 사람들이 의기양양 활보하고 있다
그들이 아랫도리를 벗는 날은
한없이 곱상해지고 슬퍼지고 부끄러워지고 촉촉해진다
살아가는 진액이 다 그 속에 숨겨져 있다
(하략)
윗도리 입어라, 그러면 티셔츠이려니 하는데 아랫도리 벗어라, 그러면 살인가 싶어서 왠지 야한 느낌인 거야, 그치? 언젠가 지인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가 불순한 생각만 한다고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검색 한번 해봤더니 지위 계급의 높고 낮음도 운운이 되더라고요. 목욕탕에 들어갈 때 일단은 아랫도리에 손이 가지요. 본능인 거지요. 따지고 보면 구근이란 얘긴데, 그렇다면 우리 사는 일이 너나 나나 다 똑같이 생겨 먹은 이 뿌리 잘 감추다 가는 놀이라고 봐도 될까요. 어럽쇼, 근데 간호사인 동생이 말해주네요. 그 아랫도리 다 비슷해 보여도 죄다 다르게 생긴 거 있지? 아무렴, 일단 내 것부터 좀 들여다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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