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엄마와 홍시와 수학 문제집

시인 최주식 2014. 1. 1. 20:04

엄마와 홍시와 수학 문제집

홍시 보면 엄마 생각난다는 노래… 난 무엇을 보면 엄마가 생각날까
학원 찾느라 바쁜 요즘 엄마들… '문제집 보면 그립다'는 말 들을지도
아이랑 고구마 먹으며 얘기하고 크는 모습만 보는 환경 됐으면

송민화 독서 지도사
송민화 독서 지도사
11월의 오후, 운전을 하다가 나훈아의 '홍시'를 들었다. 노랫말에서는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울 엄마'라고 한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나중에 무엇을 보면 엄마가 생각날까, 아니 무엇을 보든 엄마가 생각나지 않을까 하면서. 백화점에서 스카프 두른 멋쟁이 할머니를 보면 평생 논밭에서 일한 엄마가 생각나겠지. '6시 내 고향'에 푸근한 시골 할머니가 나오면 엄마가 생각나겠지. 마늘을 보면 1년 내내 먹고도 남을 만큼 마늘을 까서 찧어주신 엄마가 생각나겠지. 김장철이 되면 오죽할까.

나훈아의 노래는 홍시를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고 했다. 먹을 게 넉넉지 않던 시절,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잘 익은 홍시를 주고 당신은 벌레 먹었거나 땅에 떨어진 홍시를 털어 드셨을 것이다. 그런 인생을 살고 자식에게 해준 게 없다고, 그래서 미안해하며 눈을 감으신 건 아닐까. 아들은 노래한다.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힘든 세상 뒤처질세라, 사랑 땜에 아파할세라'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걱정했던 어머니가 홍시가 열릴 때면 더욱 그립다고.

이 시대 엄마들은 어떤 엄마로 살고 있을까. 좋은 영어 학원과 수학 학원 알아보기, 우리 아이 점수와 옆집 아이 점수 비교하기, 반 평균 점수 확인하기, 왕따·학교폭력·학업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는지 살피기, 바쁜 와중에도 책 읽고 스펙 쌓으라고 떠밀기, 입시 제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그러다 대학 입시를 치를 때면 우리나라 엄마들은 온몸으로 소리 없이 떨고 울어야 한다. 어떤 남자 아이는 수능시험을 보는데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보다 자기 심장 소리가 더 커서 문제를 제대로 못 풀었다고 한다. 어떤 우등생은 수능시험이 끝나고 엄마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오빠에게 전화해서 울었다고 한다. 단 한순간도 공부를 소홀히 한 적이 없는데 시험을 너무 못 봤다고, 어떡하느냐고. 어떤 여자아이는 재수를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로 병이 생겨 의사 앞에서 울었다고 한다. 우리 집도 대학 입시를 치르며 온 가족이 울었다. 수능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학교에서 밤늦게 돌아온 딸이 엄마 아빠를 불러놓고 큰절을 했다. 딸아이는 절을 하며 울었고, 울면서 말했다. "그동안 저도 고생했지만 엄마 아빠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능 날 아침 절을 하면 울게 될까 봐 미리 절을 드립니다" 하고. 가슴이 미어졌다. 살다 보면 울 일이 많은데 가혹한 입시 제도 때문에 울 줄이야.

[ESSAY] 엄마와 홍시와 수학 문제집
/일러스트=오어진 기자
엄마들은 이렇게 살고 싶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영어 학원 보낼 생각이 아닌, 같이 고구마 쪄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하고 끝. 시험 걱정하지 않고 아무 때나 아이 손잡고 도서관에서 실컷 책 읽고 끝. 주말이면 숙제와 수행평가와 시험 부담 없이 가족끼리 가뿐한 마음으로 야외로 나가 놀고 끝. 아이가 놀다 지쳐서 또는 너무 심심해서 운동하고 미술하고 악기를 연주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 역사가 수능 과목이 되어서 사교육 하나를 또 해야 하는 나라가 아닌, 이순신을 존경하다 보니 난중일기도 읽고 싶어지는 환경. 자식이 대학 입시를 치르는 날, 별일이 아니기 때문에 엄마는 친구들과 온천 여행을 갈 수 있는 환경. 대학 간판으로 인생이 결정되지 않고 '소질' '노력' '인간다움' '양심' '지혜' 같은 고귀한 가치로 인생이 결정되기 때문에 느긋하게 자식 크는 모습을 구경만 해도 되는 환경.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이 '수학 문제집을 보면 냉장고 같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찬바람이 불면 영어 학원 주차장에서 서성이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고 노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안개 끼고, 서리 내리고, 소나기 내리고, 은행잎 날리고, 함박눈 내리던 날이 기억나는 게 아니라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행평가, 모의고사 보던 날만 기억나게 해서는 안 된다. '나훈아의 홍시가 상징하는 것은 다음 중 무엇일까' '이 노래에서 홍시라는 가사는 몇 번 나오는지 다음 중 고르시오'라고 묻는 교육이 아닌, 누구는 홍시로 노래하고 누구는 홍시로 시를 쓰고 누구는 홍시로 요리하고 누구는 홍시가 익는 과정을 관찰하고 싶어지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 '홍시로 머리 염색을 해볼까' 하고 엉뚱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교육 환경과 제도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송민화 | 독서 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