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서지문 교수에게 조지훈의 ‘승무’ 한 구절은 전기 충격처럼 꽂혔다. [최효정 기자]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 조지훈(1920~68) ‘승무’ 중에서
우리 집 안방에 이 시가 단정하고 예쁜 붓글씨 액자로 걸려 있었다. 경기여고 서도반장을 했던 언니의 습작이었는데 언니가 유학을 간 후에 어머니가 큰딸 보는 듯 보시려고 표구해서 걸어두신 것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이 시는 나같이 둔한 인간은 감히 깨고 들어갈 수 없는 오묘하고 난해하고 고차원적인 시 세계의 표상처럼 생각되었다. 응시하고 있노라면 무언가 기막힌 사연이 있는 여인의 애절한 표정과 몸짓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듯했지만 붙잡으려 하면 사라져버리곤 했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버린 여인의 파릇한 삭발 머리를 사뿐히 덮은 나비 같은 고깔, 애수를 자아내는 그녀의 고운 뺨, 그녀의 절제된 열정의 춤사위를 말없이 비춰주며 녹아내리는 촛불, 깊은 슬픔을 머금은 또렷한 눈동자, 그리고 밤을 새워 우는 귀뚜라미…. 이 모든 것을 합해도 나는 그 여인의 비밀에 다가갈 수 없었다. 간장(肝腸)이 끊어지는 슬픔과 고뇌를 안으로 안으로 삭여서 한 편의 정결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낸, 그래서 시인의 마음에 그토록 깊은 반향을 일으킨 이 여인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사와 함께 액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내가 사회 초년생일 때, 한창 이 세상은 왜 이리 부조리하고 사람의 일생에는 왜 그리 고뇌가 많은가를 번민할 때 우연히 어디에서 이 시를 다시 대하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 전기충격처럼 꽂힌 구절이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였다. 그때 그 구절은 나에게, 번민과 고뇌가 없는 삶이 복되고 가치 있는 것이기보다 번뇌가 등대가 되는 삶이 고귀하고 의미 있는 삶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그 이후로 번뇌를 지혜로 승화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지향했으나 아직 요원한 것 같아 슬프다.
한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과 내적인 고뇌와 슬픔, 그리고 그 고뇌와 슬픔을 삭여서 예술로 승화하려는 몸짓을 이토록 숨막히게 아름답고 절절하게 표현한 조지훈 선생의 언어는 가히 주술적이다.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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