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낭송/낭송하기 좋은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시인 최주식 2017. 9. 19. 11:32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 경례밖에 몰랐고

청결한 눈짓만 남기고 모두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무디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우리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현기증이 났다

나는 이국의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바보였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한 한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블란서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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