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 나태주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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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은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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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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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 /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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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명절 / 이채
말이 없다 해서 할 말이 없겠는가
마음이 복잡하니 생각이 많을 수밖에
고향 산마루에 걸터앉아
쓸쓸한 바람 소리 듣노라니
험난한 세상 , 힘겨운 삶일지라도
그저 정직하게 욕심 없이 살라고 합니다
어진 목소리 , 메아리 같은 그 말씀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왔기에
떳떳할 수 있고 후회 또한 없다지만
이렇게 명절이 다가오면
기쁨보다는 찹찹한 심정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 , 형제 귀한 줄 뉘 모르겠는가마는
자식 노릇 , 부모 노릇
나이가 들수록
어른 노릇 , 사람 노릇
참으로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세상은 뜻과 같지 아니하고
삶이란 마음 같지 아니하니
강물 같은 세월에 묻혀버린
내 젊은 날의 별빛 같은 꿈이여 !
올해도 빈손으로 맞이하는 명절
그래도 고향 생각 설레어 잠 못 들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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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그리운 날은 / 장남제
고향이 그리운 날은
식탁에 앉아
들창 밖 가랑비 소리만 들어도
동구밖 돌팍처럼 굳어버린 가슴
가만가만 젖어옵니다
앞산, 싸리순 위로도
뒷산, 너른 갈잎 위로도
마을앞 무논을 지난 가랑비가
가랑가랑 밟고 지나가고
안개는 가만가만 허리를 감아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찌그러진 양푼 같은 무논에서
물꼬를 지키던 어린 두루미
벼잎처럼 푸른, 그 꿈을 메고
홀연히 도회로 날아가던 날은
동구밖 널찍한 돌팍 위에
함박눈이 갈팡질팡 내리더니
무논은 설국의 전설이 되었고
고향이 그리운 날은
물국수를 놓고도
굳어가는 가슴팍에 가랑가랑 내리는 가랑비
굵어진 빗방울로 뚝뚝,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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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省墓)/손광세
어린 나를 앞세우고
성묘하러 가시던
아버님의 산소를 찾는다.
성묘길에 오르면
한풀 꺾인 햇살처럼
자상해지시던 아버님.
"우리 손자 오느냐고
아버지께서
반가워하실 게야."
아버님이
아버님의 아버님으로부터
들으셨을 말씀.
그날의 나처럼
황금 날개의 여치나 쫓는
자식놈에게 들려준다.
구절초 핀 등성이를 오르면
초가을 바람이듯
쓸쓸해지시던 아버님.
모시옷 차려 입으시고
성묘하러 가시던
아버님의 산소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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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 길 / 최홍윤
뜨거운 피가 흐르던
저승의 가족과 상봉하는
가장 뜨거운 나들이 길
이런 길을 한해 한번 가 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상큼한 가을을 마시며
서로 닮은 사람들과 눈웃음치며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것
고조 부모보다도 증조 부모가
조부모보다도 아버지가 더 뜨겁다
혈액형과 촌수도 촌수지만
이승을 등진 섭섭함이 더 진해서
아버지의 무덤이
내 가슴을 가장 뜨겁게 달군다
성묘 길
세대 차니 종교니 하는 것은
부차적인 그들만의 문제이고
얼굴을 모르거나
오래된 이별을 그리워하며 다녀오는 길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겐 분명히
아름답고 즐거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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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외로웠다 / 이정하
나는 외로웠다 바람 속에 온몸을 맡긴
한 잎 나뭇잎 때로 무참히 흔들릴 때
구겨지고 찢겨지는 아픔보다
나를 더 못 견디게 하는 것은
나 혼자만 이렇게 흔들리고 있다는
외로움이었다
어두워야 눈을 뜬다
혼자 일 때, 때로 그 밝은 태양은
내게 얼마나 참혹한가
나는 외로웠다
어쩌다 외로운 게 아니라
한순간도 빠짐없이 외로웠다
그렇지만 이건 알아다오
외로워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라는 것
그래 내 외로움의 근본은 바로 너다
다른 모든 것과 멀어졌기 때문이 아닌
무심히 서 있기만 하는 너로 인해
그런 너를 사랑해서 나는
나는 하염없이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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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는 밤/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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