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 / 김사인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 왔나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 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볕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의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ㅡ시집《가만히 좋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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