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이기철
나무가 직립하는 데는 백만 년이 걸렸을지 모를 일이라고
겨울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나무의 마음을 읽는 데는 참 오래 걸린다
사람보다 먼저 땅을 차지했을 나무
사람보다 먼저 경사를 딛고 일어선 나무
나문들 어찌 제자리에만 서 있고 싶겠는가
나비 날아가는 것 보면 얼마나
날아가고 싶겠는가
그래서 나무는 온종일 가지를 흔든다
아직도 바로 서지 못하고 구불구불한 나무 곁에서 곧게 선 나무는
자벌레도 송충이도 없다면 그는
생을 포기했을 것이다
누구 있어 내게 묻는다
나무를 이렇게 오독해도 되는 거냐고
그렇다 나는 나무를 오독한다
아니다, 나는 인생을 오독한다
오독이 나를 생생히 물들인다
이기철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서정시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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