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낭송/낭송하기 좋은 시

나랑 함께 놀래/박노해

시인 최주식 2021. 1. 12. 23:49

나랑 함께 놀래?

 

박노해

 

 

어린 날 나에게 가장 무서운 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도 아니었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거였네

 

세 살 많은 영기가 우리 반에 편입한 뒤

동무들을 몰고 다니며 부하로 따르지 않는

나 하고는 누구도 함께 놀지 못하게 한

그 지옥에서 보낸 일 년이었네

 

동백꽃 핀 등굣길을 혼자 걸으며 울었고

오동잎 날리는 귀갓길을 혼자 걸으며 울었고

텅 빈 집 마루 모퉁이에 홀로 앉아 울었었네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기도를 해봐도

동무가 그리워서 사람이 그리워서

책갈피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곤 했었네

 

5학년이 되던 해 보슬비는 내리는데

자운영꽃이 붉게 핀 논길을 고개 숙여 걸어갈 때

나랑 함께 놀래?

뒤에서 수줍게 웃고 있던 아이

전학 온 민지의 그 말 한마디에

세상의 젖은 길이 다 환한 꽃길이었네

 

돌아보니 멀고 험한 길을 걸어온 나에게

지옥은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홀로 걷는 길이었고

천국은 좋은 벗들과 함께 걷는 고난의 길이었네

 

나랑 함께 놀래?

 

그것이 내 인생의 모든 시이고

그것이 내 사랑의 모든 말이고

그것이 내 혁명의 모든 꿈이었네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나랑 함께 놀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수록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