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삶의 향기] 사랑과 나눔의 바이러스

시인 최주식 2009. 12. 28. 20:56

[삶의 향기] 사랑과 나눔의 바이러스

 

봉사활동으로 갔었지만 주는 기쁨을 오히려 제가 받고 돌아왔습니다.” 얼마 전 아프리카 케냐에서 백내장을 앓는 어린이들을 수술해준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안(眼)센터장 주천기 교수의 말이다. 주 교수가 머나먼 케냐로 날아가 의료봉사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 선종이었다. 그는 김 추기경의 각막 이식 수술을 집도했던 두 명의 의사 중 한 명이다. 주 교수는 김 추기경의 각막 이식 수술 후 “남에게 베푸는 삶을 더 추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살아오면서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와 봉사를 제대로 못 해 부끄럽다”고 했다.

뒷이야기이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직후 각막적출을 못 할 뻔했다. 반대하는 의견이 일부 있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이 너무 고령이라 장기를 사용하지 못하면 시신만 훼손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김 추기경을 빈소인 명동대성당으로 운구하고 장례 절차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장례위원회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때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김 추기경께서 남기신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김 추기경은 이미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때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에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했었다. 다행히 김 추기경께서 남기신 각막은 두 개 모두 아주 양호한 상태였다. 다음 날 두 사람이 각막을 이식받아 빛을 보게 되었다.

김 추기경께서 마지막 선물로 남기신 각막으로 두 사람만 눈을 뜬 게 아니었다. 우리 사회 많은 이들이 사랑과 나눔에 눈을 뜨게 됐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귀하게 여기는 우리 전통 때문에 장기기증이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 추기경의 각막 기증 이후 사회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에 따르면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사후 장기기증 신청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올 한 해 장기기증 희망 등록만 4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 한다. 이는 예년 평균치에 비해 20배로 증가한 수치다.

성경에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장 13절)고 가르친다. 사후 장기기증은 한마디로 다른 이와 목숨을 나누는 숭고한 행위다. 우리의 육신은 죽으면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세상을 떠나면서 누군가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고 새 희망과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2007년 12월 링 위에서 쓰러져 뇌사 판정을 받은 최요삼 선수는 2008년 1월 여섯 명의 환자에게 장기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얼마 전 최 선수의 어머니는 방송 인터뷰에서 “당시에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는데 누군가가 내 아들의 선물로 새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들이 아직도 살아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눔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다. 내가 쓰고 남은 것, 나에게 불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은 진정한 나눔이 아니다.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나눔이 된다. 사랑은 의지이며 노력인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2009년도 저물어 간다. 2010년 새해엔 우리 사회에 사랑과 나눔의 바이러스가 널리 널리 퍼지기를 기원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