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데스크] 송년 건배사 삼행시
"우리, 건배사는 '변·사·또'로 해요."
2010년도 신춘문예 시와 문학평론 부문 심사를 마치고 심사를 맡은 문정희·최승호 시인, 문학평론가 이남호·박혜경씨와 간단한 저녁식사를 했다. 따뜻하게 데운 소주 주전자가 나오자 문정희 시인이 송년 건배사(乾杯詞)를 제의했다. "변사또 알아요? '변치말고 사랑하고 또 사랑합시다'라는 뜻인데 우리 그걸로 해요." 문 시인의 설명에 이남호 고려대 교수가 말을 받았다. "완전히, 시(詩)네!" 모두 "변사또!"를 외치며 술잔을 들었다.
건배사도 진화한다. '위하여' '이대로'가 물러간 연말 송년 술자리에선 '건배사 삼행시(三行詩)'가 유행 중이다. 두보(杜甫)처럼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쓰지는 못해도, 한 잔 술 힘을 빌리면 이태백(李太白)쯤은 될 수 있는 아마추어 시인들이 경칩에 개구리 나오듯 전국 곳곳에서 등장해 1년간 참았던 시심(詩心)을 풀어낸다.
내친 김에 요즘 송년 모임에서 유행하는 삼행시를 들어보자. '사이다'(사랑합니다/ 이 생명 다 바쳐 사랑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사우나'(사랑과/ 우정을/ 나누자)는 삶과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을 기념한다. 우리 사회의 풍경을 엿보게 하는 시대의 거울같은 작품들도 있다. '개나리'(계급장 떼고/ 나이도 잊고/ 릴랙스 합시다)에서는 엄격한 직장생활의 위계질서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자유롭고 싶어하는 회사원들의 마음이 읽힌다. 삼행시는 아니지만 '당신멋져'(당당하고/ 신나고/ 멋지게/ 져주며 살자)라는 건배사에는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사회를 꿈꾸는 이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유쾌한 시 한 수로 한 해를 마감할 줄 아는 한국인의 시 사랑은 외국 문인들에게는 경이와 부러움의 대상이다. 시집이라면 소수의 마니아들이 자비로 출판해 자기들끼리 돌려가며 읽는 것으로 아는 미국 시인들에게 1만부 넘게 팔리는 시집이 수시로 등장하는 한국은 시에 있어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다. 신문사가 신춘문예를 실시하는 것에도, 그 행사가 예비 문인들이 프로로 입문하는 등용문인 동시에 한 해를 여는 국민적 문학 백일장이라는 사실에도 놀란다.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응모 시는 모두 5379편이다. 현대시 100주년이었던 지난해에는 7000편 넘게 응모하는 기록적인 투고 열기를 보이기도 했다. 신춘문예 모집 사고(社告)가 나고 단 한 달 만에 5000편 넘는 작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 뜨거운 열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대한민국만의 현상이다. 브라질의 뒷골목 축구가 세계를 제패한 삼바 축구의 힘이 된 것처럼, 송년회에서조차 시를 짓고 신문사에 시를 보내는 이 든든한 시 사랑의 저변이 훗날 노벨문학상의 힘이 될지도 모른다.
미처 송년 모임에서 실력 발휘할 기회를 놓쳤다면, 휴대전화에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쓴 시로 연하장과 안부 인사를 대신하는 황지우 시인처럼 해 보면 어떨까. '새해 마당에 또 내리는 눈:/ 차마 밟지 못하고,/ 저 순한 마음의 파스 한 장./ 당신의 등짝에 붙이려오.' 휴대 전화의 화면을 넘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압축해서 쓰는 그의 시는 40자를 넘지 않는다 해서 지인들 사이에선 '40자 시'로 통한다.
미국 시인 아카데미는 스마트폰으로 아카데미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는 이들에게 시를 배달하기 위해 주제별로 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서비스하고 있다니, 미국 케이스를 벤치마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송년회 삼행시 짓기의 여세를 몰아 올해 마지막 날 밤에는 가족과 벗에게 멋진 시 한 구절 문자로 '쏘는' 새로운 풍경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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