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대한민국 르네상스

시인 최주식 2010. 1. 2. 20:24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대한민국 르네상스

 

# 지난 연말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 공항에서 가방을 통째로 날치기당했다. 돈뿐 아니라 노트북 컴퓨터와 보름 가까이 이탈리아 곳곳에서 찍은 르네상스에 관한 사진과 자료들마저 송두리째 날아가 참으로 난감했다. 하지만 그것이 100년 전 우리가 겪은 일에 비하랴.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날치기당하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지 않았던가. 비단 강토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말과 글, 얼과 혼, 그리고 정신과 생각마저 강탈당했다. 해방을 맞은 후에도 분단과 전쟁의 아수라장을 거치며 겨우 비루한 몸만 살려냈다. 그 후엔 먹고 살기에 급급해 허리띠 졸라매고 죽도록 땀 흘려 이제 살 만하게는 됐지만 아직도 우리의 혼과 얼, 정신과 생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 원조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가 됐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속이 허하다 못해 텅 빈 느낌이다. 돈만이 아니라 얼로,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으로, 꿈만이 아니라 혼으로 새롭게 채워야 할 때다. 지금 하지 않으면 더 나아갈 수 없다. 이를 위해 고유한 문화적인 저류의 심층에 깊이 관정해 우리의 얼, 정신, 혼을 새로 길어 올려야 한다. 이것이 2010년 벽두에 ‘대한민국 르네상스’를 천명하는 이유다.

# 르네상스란 재생·부활·부흥의 의미를 갖는다. 15~16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1000여 년의 세월을 뚫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정신적 유산을 계승하고 재생해 새롭게 부활시켰다. 신플라톤 학파의 세례를 받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그랬고, 로마의 판테온 신전에서 힌트를 얻은 브루넬리스키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르네상스의 원천은 어디며 무엇일까?

# 올해가 경술국치 100년이라면 내년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당하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불사를 통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대장경 조판을 시작한 지 꼭 1000년이 되는 해다. 고려 현종 2년인 1011년부터 77년간 조판되어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모셔졌던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자 다시 대규모 조판작업을 거쳐 만들어낸 것이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된 재조대장경, 속칭 팔만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으로부터 헤아려 실로 24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이룩한 거국적인 정신적 대사업의 귀결인 팔만대장경은 당시 고려가 탁월한 콘텐트 창조능력을 지녔음을 입증한다.

# 고려는 무인이 세운 나라였고, 특히 몽골 침입 당시는 무신정권시대였지만 그들은 외적이 침입해 왔을 때 무(武)로만 대응하지 않고 문(文)으로, 나아가 얼과 정신으로 더 많이 대응했다. 동서고금에 다시없는 일이다. 우리는 한때 그런 대응양식을 비웃었지만 이제는 바로 보자. 우리가 비루함을 떨치고 세계로 나아가 우리의 잠재된 위력을 발휘할 대목이 바로 여기 있다.

# 비단 대장경만이 아니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도 78년이나 앞섰던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에서도 드러나듯 우리는 최선진의 문화강국이었다. 마침내 우리 문화력은 1443년 조선의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꽃핀다. 대한민국 르네상스는 바로 이러한 흐름을 원류요 원점으로 하여 우리의 얼과 혼, 정신과 생각의 근원을 단단히 파헤쳐 바로 세우는 일이다.

#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도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꽃폈다. 우리 대한민국 역시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를 걷어내고 이제 새로운 르네상스로 나아가자. 팔만대장경과 직지심경, 훈민정음에 담긴 뜻과 정신을 새롭게 하자. 그리고 우리의 새 미래를 열자. 지난 100년이 질곡에 빠지고 그것에서 헤쳐 나오는 도정이었다면 앞으로의 100년은 새 지평을 열고 새 문화를 꽃피우는 시대가 되게 하자. 2010년 벽두에 우리는 ‘대한민국 르네상스’ 그 첫 도정에 서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