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루저와 핑크택시
첫애가 태어나던 날. 내가 루저(패배자?)란 걸 그날 알았다. 살을 찢는 산통이 시작되어 아파서 죽겠는데 식구들은 수군수군 난리다. 심장 소리는 아들인데 부른 배 모양은 꼭 딸 같아서 걱정이란다. 친정엄마의 어설픈 백일기도 덕인지 나는 예쁜 딸을 낳았고, 3년 후에도 또 딸을 낳아 어른들을 실망시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없던 나는 “딸 둘 낳고 너같이 잘난 척하는 애는 첨 봤다”는 시어머님의 핀잔까지 들었다.
그렇다. 딸을 낳은 산모와 태어난 딸은 루저요, 아들 낳은 산모와 태어난 아들은 위너였던 것이다.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환영도 받지 못한 채 낯선 삶을 시작해야 하는 딸들. 식당이나 택시나 여자가 첫 손님이면 하루 종일 재수없다고 구박해서 눈치 봐야 하고, 생각대로 말을 다하면 여자가 또박또박 말대꾸한다고 욕한다.
이런 것들이 그리 옛날 얘기만도 아니다. 얼마 전에 동안(童顔)의 외모를 지닌 30대 여자 후배는 길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뺨까지 맞았다. 세상이 말세라고 하면서 ‘건방지게 젊은 X이’ 운운하더란다. 한 달 전인가. 작은 키 때문에 루저 취급 받았다고 집단소송까지 하며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남자들. 만약 그들이 길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만으로 건방지다며 뺨을 맞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지금은 딸도 축복받으며 태어나고 위너로 대우받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 옛날 여자를 루저로 여기던 남자들의 오래된 인식은 왜 그리도 더디 바뀌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가장 취약한 문제가 밤거리 안전이라던데. 밤에 돌아다니는 여자들은 자기 맘대로 해도 되는 줄 아는 남자들이 많은지 지금도 성폭력 사건은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여자라고 밤 외출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 그래서 그들의 안전한 밤 외출을 돕기 위해 우리가 기다려 왔던 ‘여성전용 콜택시’가 드디어 생긴단다. 일명 ‘핑크택시’라고 독일·일본·영국·멕시코 등등 여러 나라에서는 이미 운영 중이다.
2004년 9월. 온 나라를 경악하게 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살인동기가 ‘밤에 나다니며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을 응징하려는 것’이었다고 하더라. 여자들의 밤 외출이 화를 불렀다고 친절한 해설까지 곁들인 뉴스 보도도 있었다. 남자에겐 중요한 사회생활인 밤 외출이 여자에겐 ‘함부로 몸 굴리는 일’이란 말인가? 며칠 후에 ‘피도 눈물도 없는 밤’(밤에 눈물도 피도 흘리고 싶지 않다는 말)을 타이틀로 내걸고 여성전용 파티 행사를 했다. 그날 밤 행사에 참석한 딸들을 픽업하러 나온 부모들의 강력한 요청이 있어 ‘여성전용 콜택시 도입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준비했다. 서울시에 공문 발송도 했다. 그 후로 해마다 시청 앞 광장에서 꽃도 떡도 나눠주고 폐차를 얻어다가 분홍 꽃을 색칠해서 핑크택시를 만들어 퍼레이드도 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여자 운전자를 고집하는 것은 남자를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늦은 밤, 택시라는 밀폐된 공간, 개방된 옷차림과 맥주 한 잔의 술 냄새, 핸들을 쥔 남자 운전자. 이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잘못 조합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 봐 그것이 겁이 나서 그런다. 비록 의도된 건 아니라도 말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하지 않는 그날이 올 때까지 핑크택시는 필요하다. 해를 넘기지 않고 시행을 결정해준 국토해양부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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