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길어올리는 물빛 두레박 (시인의 산문) |
1. 가을빛이 내게 비추어져서 가을빛이 비친다. 여름 햇볕보다 여리게 그러나 그것은 나직하고 은근하다. 여름볕이 정수리 위에서 짓누른다면 가을 햇볕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멀리서 오는 볕이다. 가을의 여린 햇볕은 잠자리를 하늘 가장자리로 날게 하고 가지마다 고추 열매들이 빠알갛게 흔들리게 한다. 이 세상이 다 익는다. 벼를 추수한 논은 메뚜기들의 놀이터다. 메뚜기는 작지만 살아 날뛴다. 살이 잘 오른 그것들은 벼 그루터기만 남은 논길을 뛰고 또 뛴다. 그럴 때 아이들은 분주하게 그것들을 잡아 소줏병에 담고, 논둑 한쪽에선 불을 지펴 잡은 것들을 그을린다. 가을 들판에서도 아이들이 주인이다. 이윽고 감이 익어 빠알갛고 말랑한 홍시가 이 세상으로 뚝, 떨어질 것이다. 그것들도 아이들 차지다. 밤도 익는다. 밤나무 밑에 가보면 입을 함박만큼 벌린 밤송이들이 알밤을 자랑스레 내보이곤 한다. 동쪽 바닷가는 바닷물결이 조금 높은 곳이다. 동쪽 바다에서 태백산맥 아래로 한참을 걸어 들어오면 그렇게 강릉(江陵)은 있다. 작은 도시, 작지만 이곳에도 꿈꾸는 이들이 있고 아름다운 삶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1950년 초가을에 태어났다. 그 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이다. 멀리 포탄이 터지고 총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였을 것이다. 총검이 함부로 날뛰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썰물에 쓸리듯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란 갔고 다시 밀물처럼 들어왔다. 그 해는 이 세상의 밤과 낮이 바뀌었다. 그새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그 빈 자리는 오래도록 상처로 남아 있다. 내 학교 친구 가운데는 홀어머니를 둔 아이들도 여럿 있다. 그들은 6.25 전란의 물살에서 젊은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들은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사람처럼이나 정서적 불균형을 보이곤 한다. 나는 그 친구들이 멀리 서 있는 것이 아직 보인다. 내 선친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이북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수하면(水下面) 고성리(古城里) 317번지가 고향인 아버지는 함흥사범학교를 나와 일제(日帝) 말기 징용을 피해 잠시 뜻하지 않게 일본 경찰에 들어가 있었고 해방후 교편으로 돌아오게 되셨다. 그리고 곧 강원도로 혈혈단신 남하했다. 남쪽에서 교원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언젠가 내 호적등본을 떼어보면 원적(原籍)이 함경남도 단천군으로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단천군은 오랫동안 여진(女眞)족의 할거지였으나 고려 예종(睿宗) 때 윤관(尹瓘)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우리 영토로 편입한 곳이라 한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아버님이 남겨놓으신 교단 퇴임기념문집을 펼쳐보았다. 내가 태어난 1950년엔 전쟁 발발로 교편에만 계시지 못하고 국군종합사관학교에 입교했고 연합군 소대장으로 참전하신 걸로 나와 있다. 붓글씨를 많이 쓰셔서 문집 표지 제자(題字)를 보니 아버님을 다시 뵙는 것만 같다. 나는 선친처럼 붓글씨 연습은 하지 못하고 시랍시고 끄적여 보았다. 나의 삶 저편에는 강릉의 햇볕이 다사로이 비치어라. 소나뭇가지 그늘을 지어 이름 모를 들꽃도 낮잠에 들고 새들은 노래하듯 쉬어라. 나의 삶 저편에는 아이야,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지 말고 너의 삶을 꿈꾸듯 나의 노래를 들어라. 나의 삶 저편에는 강릉의 햇볕이 -졸시 '나의 삶 저편에는' 전문 내게 강릉은 이렇게 따뜻한 곳이다. 내 유년의 넘실거리던 꿈이 뒹구는 곳이다. 이 시는 내 첫 시집의 첫 페이지에 실려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만족스럽게 생각지는 못하고 있다. 내가 뛰어놀던 옛동산을 새로운 세계로 뒤집어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내 불만인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면 사랑스럽다. 내가 내 아이에게 말하는 듯한 시에서 되레 내 선친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나는 강릉을 자주 가지 않는다. 강릉을 떠나온지 이미 40년, 해마다 여름 휴가 때 들르곤 했지만 최근엔 자주 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가슴 속에만 아껴두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가보고 싶다. 이제 직장의 짐을 훌훌 벗어버린 지금 다시 추억 속으로 가보아야 할 것이다. 안 가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하지만 언제 가볼 것인가. 나는 아마 영영 가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막연히 가보아야지, 하는 것뿐이다. 아니 끝내 가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 가을이 온다. 한여름의 내리쬐는 볕이 아니고 멀리서 은근하게 비추는 빛, 나는 그 빛을 다시 받는다. 어쩌면 이른 시간 안에 오랜 고향 강릉을 다녀올지도 모르겠다. 2.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멀리 까마득히 있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그 어린날에 나는, 철원군 갈말읍에 있었다. 선친이 철원군 교육청 장학사로 계실 무렵이다. 아마 여섯 살쯤 되었을 터인데, 나와 동생은 미군 탱크 뒤를 따라 뛰곤 했다. 기브 미 초콜릿! 초콜릿! 하며. 언젠가 하루는 탱크 위의 흑인 병사가 상자 하나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동생과 나는 집에 들고 와 상자를 열어보았다. 정말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초콜릿뿐만 아니라 빵, 통조림 등등. 그리고 아, 담배도 들어 있었다. 동생과 나는 담배를 피워물다 취한 적이 있었다. 큰 길을 가로질러 가면 교회당이 있었고, 추수감사절엔가 성탄절엔가 우리 또래들은 연극 공연도 했다. 사내 아이들도 입술을 붉게 칠하고 무대를 오르내렸다.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왔고, 이듬해 나는 갈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급우들과 어지럽게 움직이던 생활이 멀리 아득히 기억난다. 운동회에서 함께 달리던 내가 기억난다. 어머니 손을 잡고 삼부연폭포로 소풍 간 기억도 난다. 앨범 어느 갈피에 그때 찍은 사진을 보았다. 그 시절 우리는 가족이었고, 형제였으며, 급우들이었다. 우리는 항상 함께였다. 그리고 나는 성장했고, 시를 읽었다. (천막교실, 가마니 위에 비는 내리고) 우리는 고무신으로 찝차를 만들었다. 미군 찝차가 달려왔다 네가 내리고.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고, 그러하여 너는 메이비가 되었다. 미제 껌을 씹는 메이비. 종아리 맞는 메이비. 흑판에 밀감을 냅다 던지는 메이비. 으께진 조각을 주으려고 아이들은 밀려 닥치고. 그 뒤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섰는 미군 같은 메이비. 남자보다 뚝심 센 여자애보다 뚝심 센 메이비. 여자애를 발길로 걷어 차는 메이비. 지금은 비가 내리고. 어느 틈엔지 미군들을 따라 떠나 버린 메이비. 바다 건너 가 소식도 모를 제 이름도 모를 메이비.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메이비. 다시는 너를 메이비라고 부르지 않을 메이비. -장영수, '메이비' 전문 메이비 maybe, 아무 이름도 좋았을 시절, 내 이름을 얼굴처럼 가지지 않아도 좋은 날들이 그때였다는 생각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던 시절, 그날들이 멀리서 내 기억의 연기를 피운다. 아, 나는 이 대목을 얼마나 깊이 읽었던가.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나는 그렇게 고아인 어른이 되고 말았다. 시는 인생을 해석 interpretation 한다. 시는 인생을 묘사 description 하지 않는다. 분석하고 설명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생각의 무엇이 잘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나는 내가 고아인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다 건너 가 소식도 모를/ 제 이름도 모를 메이비>가 내 젊은 날의 시였다. 멀리 아득히 기억의 연기를 피워올리던 그날들이 그립다. 동생과 내가 하나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였고, 가족이 하나이던 그날들이 그립다. 어린 급우들과 함께 뛰어놀던 학교 운동장이 그립다. 풀과 나무들이, 폭포수와 전깃줄이, 그 위에 앉아있던 까치떼의 날갯짓이 그립다. 글 = 한택수 시인 문화저널21 문학편집팀 munhak@mhj21.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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