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時調)창작법

[기획2] 신춘문예 우리 문학사에 어떻게 기여했나

시인 최주식 2010. 1. 5. 21:28

[기획2] 신춘문예 우리 문학사에 어떻게 기여했나
 
계간시인세계
신춘문예 우리 문학사에 어떻게 기여했나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이  재  복 | 문학평론가

신춘문예의 시작은 우리 신문의 창간과 맥을 같이한다. 매일신보가 창간된 것은 1910년이고 신춘문예가 시행된 것은 1920년이다. 매일신보의 경우 1914년 12월 10일에 ‘신년문예모집’을 하는 공고가 나 있고 이듬해 각 부문별로 입선작을 발표하고 있지만, 시부문의 경우 한시로 국한하고 주제를 내걸고 있다. 따라서 시의 경우 오늘날과 같은 신시를 모집하는 진정한 신춘문예의 효시는 1920년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된 것은 1920년이며, 신춘문예가 시행된 것은 1925년과 1928년이다.
 
경향신문의 경우에는 1906년에 창간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지로서의 위상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종합일간지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경향신문이 이것으로부터 벗어나 본격적인 종합일간지로 거듭 창간된 해는 1946년이며, 신춘문예의 시행은 그 이듬해인 1947년이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는 그 창간 연도가 각각 1954년과 1965년이고, 신춘문예의 시행 연도는 1955년과 1966년이다. 대한매일신보 및 매일신보를 개명한 서울신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문이 창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춘문예를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문의 창간과 함께 시작된 신춘문예는 순탄한 과정을 걸어온 것만은 아니다. 신문이라는 매체에 의해 제도화된 이상 그것은 또한 신문의 운명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 6·25,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각 신문이 휴간과 폐간, 복간을 거듭하면서 여러 해에 걸쳐 신춘문예가 시행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매일신보의 경우에는 1926년~1929년, 1944년, 1945년,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1926년, 1928년∼1931년, 1937년, 1941년∼1954년,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1933년, 1936년, 1937년, 1941년∼1954년, 경향신문의 경우에는 1948년∼1958년, 1960년, 1963년, 1969년, 서울신문은 1957년, 1958년, 1962년에 각각 신춘문예가 시행되지 않았다. 대체로 신춘문예가 새롭게 시작된 해는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사회 체제 및 제도가 정비된 1955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대체적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1955년 이전, 다시 말하면 1920년대부터 신춘문예를 실시해온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제도화된 형식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춘문예 제도의 발생단계와 대체적인 모습에 대한 이해는 이 세 신문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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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신춘문예를 시행한 매일신보는 여러 면에서 주목된다. 매일신문 1914년 12월 10일자를 보면 ‘신년문예모집新年文藝募集’이라는 명칭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신춘문예라는 제도화된 용어의 최초의 출현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신춘문예新春文藝’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쓰인 것은 1919년 12월 11일이다. 이후 신년문예와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번갈아 가면서 1943년까지 쓰고 있다. 1914년 신년문예모집 공고를 보면 모집 장르로는 시, 문文, 시조, 언문줄글, 언문풍월, 우숨거리, 가〔창가唱歌〕, 언문편지, 단편소설, 화畵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여기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각 장르마다 과제課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가령 1914년 시 장르의 과제는 ‘도소屠蘇’이다. 따라서 당선자들의 시제는 모두 ‘도소屠蘇’가 되었던 것이다. 심사위원의 경우에는 단순히 선자選者로만 표기했을 뿐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처음으로 심사위원의 이름을 밝힌 것은 매일신보 신춘문예가 그 명맥을 다한 1943년이다. 1943년 1월 9일자 신문을 보면 「시詩의 모색시대摸索時代」라는 제목으로 주요한朱耀翰의 평이 실려 있다.

매일신보 신춘 초기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선외가작을 뽑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외가작의 경우에는 당선자와 함께 발표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운이 좋으면 지면에 작품이 실리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상금까지 주어졌다. 이처럼 매일신보 신춘문예는 오늘날과 비교해서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매년말에 신춘문예를 공고해서 신년초에 당선자를 뽑는다는 점, 운문과 산문 등 장르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모집을 하고 있다는 점, 심사위원제를 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상금이 주어지고 있다는 점 등은 오늘날과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일신보 신춘문예의 기본틀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매일신보가 우리 신춘문예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신춘문예를 최초로 시행했다는 점 이외에도 1930년대와 1940년대초까지 이 제도를 시행해 왔다는 사실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 및 정간, 휴간을 거듭하면서 이 시기에 제대로 신춘문예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매일신보는 계속해서 그것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라는 이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총독부의 비호 아래 신문을 발행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의 선전장이 되었던 신문이 바로 매일신보다. 그래서 많은 당대의 문인들이 여기에 친일적인 작품을 게재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의 공백기에 문인을 배출하는 장으로 기능해 왔다는 것은 또 달리 보아햐 할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신보가 폐간되기 전인 1943년까지 신춘문예가 시행되면서 그다지 이름 있는 시인을 많이 배출하지는 못했다. 매일신보가 1945년에 폐간되었기 때문에 신춘문예에 대한 논의의 장에서 이 신문이 배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신춘문예의 시작을 1925년 동아일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신춘문예를 논의해온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것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지금까지 계속 발행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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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시작은 1925년이다. 1925년, 이 해에 특기할만한 사항은 신춘문예모집 공고를 전년도 말쯤에 내는 것과는 달리 신년초에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년초에 공고해서 3월에 당선자를 선정하고 있다.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살펴보면 모집 장르로는 단편소설, 시, 동화, 동요, 가정소설 등이 있었고, 1932년에는 단편소설, 시, 시조, 동요, 동화, 희곡 등이 있었다. 이 사실은 최근의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모집 장르와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평론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다르지만, 이 평론 역시 1934년 이후부터 모집 장르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으로 보면 동아일보 초창기 신춘문예 제도가 지금까지 커다란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20·30년대 시 장르의 경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항은 매일신보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외가작을 뽑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선도 가작도 아닌 그야말로 낙선된 작품이다. 낙선된 것을 선選한 경우에는 1920·30년대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간혹 최종심에서 낙선된 작품을 모아 책으로 묶어낸 경우는 있지만 이렇게 신춘문예에 응모된 작품을 선외가작이라고 해서 발표한 예는 없다. 동아일보 초창기 신춘문예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항은 심사위원을 밝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심사위원의 직접적인 거명 대신 ‘일선자一選者’로만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1940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랜 전통에 걸맞게 우리 현대시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많은 시인들이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1933년의 황순원이 「우리의 새날을 피바다에 떠서」로 등단했고, 1936년에는 서정주가 「벽壁」이라는 작품으로 역시 문단에 나왔다. (서정주의 작품은 신문에 실려 있지만 황순원의 작품은 찾지 못해 ― 실리지 않은 건지 아니면 필자가 찾지 못했는지 ― 소개하지 못했다.) 그리고 1940년 함형수(「마음」), 1955년 황명(「분수噴水」), 신동문(「풍선기」), 1956년 전영경(이영숙李英淑으로 투고, 「정의正義와 미소微笑」), 1960년 정진규(「나팔서정抒情」), 박진환(박소원朴素園으로 투고, 「가을의 시詩」), 1963년 이수익(「당신께 드리는 나의 노래는」), 1964년 이탄(「바람불다」), 1966년 이가림(「빙하기氷河期」), 1967년 이성부(한수현韓秀賢으로 투고, 「우리들의 양식糧食」), 1968년 마종하(「겨울행진行進」), 1969년 송기원(「후반기後半期의 노래」) 등이 각각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1940년까지는 심사위원이 ‘일선자’로 되어 있어 있지만 1955년 이후부터는 실명이 직접 거론되고 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주요한, 김동명, 조지훈, 박두진, 김현승, 박목월, 박두진 등이다. 이들 중 가장 많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람은 조지훈이다. 그는 1960년대 이후 거의 빠지지 않고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당선작의 결정에 심사위원의 취향이 크게 작용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다양한 시적 경향을 선별할 폭이 좁았다는 결론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선된 작품들이 심사위원의 취향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겠지만.)

동아일보의 1925년에 비해 다소 늦게 출발(1928)했지만 조선일보 신춘문예 역시 우리 시사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모집 장르라든가 당선자의 선별 및 시행 방식에서 동아일보와 큰 차이가 없다. 1920·30년대의 경우 선외가작을 두는 경우라든가, 심사위원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일선자’로 표시한다든가 하는 방식 역시 동아일보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1931년 ‘…여수麗水’라는 식으로 심사위원의 필명을 명기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심사위원의 실명은 아니지만 여수라는 필명이 박팔양이라는 사실은 그 당시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식의 드러냄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당선자와 당선작과 관련해서 주목해 볼만한 것은 1928년이다. 이 해는 조선일보 신춘문예가 처음 시작된 해로 유동민, 김병호, 하태용, 배상철, 장지영, 이원조 등 많은 당선자를 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당선작인 「조선朝鮮의 마음」, 「이 거리로」, 「새鳥」, 「새해의 선언宣言」, 「전영사餞迎辭」 등을 신문에 게재하는 과정에서, 장지영의 작품 「새해의 선언宣言」에 대해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긁어놓았다. 이것은 식민지 시대의 검열제도가 신춘문예에까지 뻗친 생생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중 특기할 만한 사항은 소설가 김동리가 1934년 ‘김창귀金昌貴’라는 이름으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선작은 「백로白鷺」이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역시 한국시사에 기라성 같은 시인들을 배출해 왔다. 1938년 김광균(「설야雪夜」), 1955년 전영경(「선사시대先史時代」), 1956년 박봉우(추봉령秋鳳嶺으로 투고, 「휴전선休戰線」), 신동문(「풍선기風船期」), 1959년 신동엽(석림石林으로 투고, 「쟁기꾼의 대지大地」), 1962년 신세훈(「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 1964년 최하림(「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 1968년 신대철(「강설降雪의 아침에서 해빙解氷의 저녁까지」) 등이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배출된 시인들이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심사위원은 1955년 이후 1969년까지 박종화, 김광섭, 양주동,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수영, 박태진, 박남수 등이 맡아 했다. 동아일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이 여기에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김수영의 참여이다. 그의 경우 1925년부터 1969년까지 1967, 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이외에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바가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에 1965년∼1968년까지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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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신춘문예의 경우는 그 출발이 1947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주목에 값한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해방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신춘문예를 중단한 시기에 그 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신춘문예사뿐만 아니라 우리 시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해의 신춘문예 입선자가 우리 시사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김종길 시인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해준다고 할 수 있다. 김종길 시인은 「문門」이라는 작품으로 가작 이석을 차지해 등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향신문 신춘문예는 그 역사에 비해 신춘문예를 시행하지 않은 연도가 많다. 1948년 이후부터 1958년까지, 그리고 1960년, 1963년, 1969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해에 걸쳐 신춘문예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경영자가 자주 바뀌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향신문은 좋은 시인들을 많이 배출해 왔다. 1964년 조태일(「아침 선박船舶」), 이가림(「돌의 언어言語」), 1965년 김종해(「내란內亂」), 1967년 윤후명(윤주형尹注衡으로 투고, 「빙하氷河의 새」), 1968년 마종하(「귀가歸家」) 등이 바로 그들이다. 경향신문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조지훈, 조병화, 박목월, 박남수, 김현승 등이다. 이들 중 조병화를 제외한 다른 심사위원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도 그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출발은 1955년이다. 한국일보의 경우에도 다른 신문과 제도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다. 1955년 신춘문예를 시행한 이후 1969년까지 한번도 시행을 중단한 적이 없다. 당선자의 면면을 보면 익히 이름이 알려진 시인들이 많이 눈에 띈다. 1959년 주문돈(「꽃과 의미意味」), 1960년 박상배(「열도熱度」), 1962년 박이도(「황제皇帝와 나」), 1964년 이근배(「북위선北緯線」), 1966년 문효치(「산색山色」), 1967년 이건청(이건李健으로 투고, 「목선木船들의 뱃머리가」), 1968년 김종철(「재봉裁縫」), 1969년 이유식(「원주민原住民」) 등이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들이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김광섭, 오상순, 서정주, 조지훈, 노천명, 박두진, 박남수, 신석초, 김종길, 송욱, 구상 등이다. 조지훈, 박두진, 박남수, 서정주, 김종길 같은 이미 다른 신문의 신춘문예 심사위원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있지만 김광섭, 오상순, 노천명, 신석초, 송욱, 구상 등은 새로운 얼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몇 명의 심사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심사를 하는 다른 신문에 비해 한국일보의 이러한 체제는 주목할만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출발은 1956년이다. 그후 1958년, 1962년을 제외하고는 거르지 않고 서울신문 신춘문예는 시행되어 왔다. 당선자의 면면으로는 1956년 이제하(「꽃 주전자와 꿈」), 1963년 장윤우(목훈木薰으로 투고, 「겨울 동양화東洋畵」와 「전설傳說을 고발告發하는 자者」 두 편), 이수익(「고별告別」), 1964년 박의상(「인상印象」), 1966년 문효치(「바람 앞에서」), 1967년 박상배(「찬가讚歌」), 1968년 박정만(「겨울 속의 봄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짧은 기간(1956년∼1969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름 있는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심사와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1956년 이후 1961년에 이르기까지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의 면면으로는 변영로, 모윤숙, 조지훈, 김용호, 김광섭, 서정주, 박목월, 박남수, 김현승, 김수영, 이동주, 조병화 등을 들 수 있다. 변영로, 모윤숙, 김용호, 이동주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중앙일보는 1966년부터 신춘문예를 시행하고 있다. 다른 신문에 비해 늦게 출발했지만 낯익은 시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1967년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로 등단한 오탁번이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서정주, 박목월, 조병화, 박남수, 조지훈, 김종길 등이다. 세 사람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 다른 신문에 비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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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를 시작으로 1925년 동아일보, 1928년 조선일보, 1947년 경향신문, 1955년 한국일보, 1956년 서울신문, 1966년 중앙일보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시사의 젖줄 역할을 해온 신춘문예에 대한 분석과정에서 드러난 해결해야 할 과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신춘문예의 시작 연도이다. 대체로 다른 신문의 경우에는 그 출발 연도가 확실하지만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1925년 신춘문예라는 이름을 달고 현상모집이 있기 전 1923년에 ‘일천호기념 현상당선신시一千號紀念 懸賞當選新詩’ 모집이 있었다. 이 둘 사이의 연관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둘째, 신춘문예를 시행하지 않은 연도의 당시 사회 현상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도사적인 차원에서 신춘문예를 해명할 때 필요하리라고 본다.

셋째, 당선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작품의 소재, 주제, 이미지, 상징, 리듬, 세계관 등 시 형식과 내용에 대한 보다 섬세한 분석을 통해 당선시에 대한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점점 패턴화되어가는 신춘문예 당선시에 대한 문제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넷째, 심사위원의 배정과 그것이 심사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이다. 심사위원의 구성이 적절했는지, 심사위원의 시적 취향이 어떻게 심사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심사위원의 구성과 그들이 행사한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어떻게 심사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는 문학과 권력의 문제에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다섯째, 당선자들의 시적인 궤적을 추적하여 정리하는 일이다. 신춘문예 당선자에 대한 자료 분석을 통해 드러난 사실은 거의 절반 정도의 시인들이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춘문예가 가지는 이벤트성에 대한 하나의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신문의 저널성과 시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에 대한 해석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재복 1966년 충북 제천 출생. 1996년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 「동양적 존재의 숲 ― 윤대녕론」으로 등단. 주요 평론 「감각과 생리 육체적 존재로서의 글쓰기」, 「전위적 존재 미학으로서의 몸」, 「육체와 혼의 양식」, 「몸과 욕망의 언어」 등. 저서 『몸』, 편저 『몸 속에 별이 뜬다』. 현재 한양대 국문과 강사
 
 
신춘문예, 그 새로움의 추구를 위하여
―― 7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경향과 흐름


     심  재  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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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지망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신춘문예에 대한 꿈을 꾸어보기 마련이다. 찬바람이 불고 가을이 깊어지면 마음이 들뜨고 분주해지는 예비 작가들에게 신문을 통한 등단제도는 실질적인 기회로서든, 혹은 낭만적인 유혹으로서든 한 계절을 앓게 만드는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문예지를 중심으로 하는 신인상 제도가 최근에 부쩍 늘면서 등단의 경로가 예전에 비해 다양해지기는 하였지만 관심과 열망의 정도를 가늠한다면 신춘문예가 지니는 상징적인 힘은 여전히 위력적이다. 그러나 이 제도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효과는 다만 문학지망생들을 양산하고 질 좋은 작가를 배출하는 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 제도가 파생시킨 부정적인 현상이나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의 저변을 확대하였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우리 문학사에 어느 정도 기여한 공로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신춘문예 현상공모의 목적은 우수한 신인을 배출하는 것이다. 우수한 신인의 선별 기준은 물론 우수한 작품을 쓰는 능력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작품의 우수성을 분별하는 기준은 경우에 따라 상황성을 띠기는 하지만 대체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신인정신에 많은 비중이 놓인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작품의 유형을 통해 당대의 문학적 경향을 가늠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상황은 역설적이다. 다시 말하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된다는 것은 기존의 경향을 극복하려는 개척정신의 결실일 터이나 그것은 기존의 세계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또한 기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조화와 불화를 동시에 포용해야만 하는 신춘문예의 도전 정신은 이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확보한다.

문학사의 흐름이라는 것이 늘 수용과 극복의 이중적인 과제를 통해 전개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신인을 배출하는 통로로써 신춘문예 제도는 현 상황의 긍정적인 역량을 선별하고 완성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로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역동적인 의지를 함께 창출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문학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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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행운이지만, 삼십여 년에 걸친 신춘문예 당선시들을 살펴보는 동안 참 좋은 시들을 많이 만났다. 응모작들뿐만 아니라 당선작들까지도 대개 당대의 창작경향에 민감한 편이어서 감동의 시효가 짧아질 소지가 다분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한 환기력을 지닌 시들을 보면서 시를 쓰는 옳은 태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글과 세상에 대해 나는 얼마나 정직하고 또 절실했는가’의 문제에 귀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제도적인 측면으로서도 신춘문예는 문학 활성화에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 문학창작의 저변을 확대하고 전문독자층을 생산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리즘을 혹독하게 검열하고 질이 좋은 작품을 제련하도록 함으로써 순도 높은 전문인 양성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좋은 시 혹은 좋은 작가들은 결국 당선의 영예를 얻게 되었지만, 그들도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1)

또한 재미있는 것은, 당선의 영예가 순전히 실력만으로 쟁취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공모 제도로서 공정하게 경쟁자들의 순위를 매겨야 하는 신춘문예 역시 완벽하게 객관적 공정성을 마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서의 주관성에 의해 경영되는 문학의 성질 때문이다. 그래서 당락의 결과를 두고 제도의 구조적인 결함이나 진행상의 실수로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사실, 최종 결선에 오른다는 것은 작품의 수준으로 볼 때 등단의 과정을 밟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당선은 한 사람의 몫이므로 드러난 결과는 모 아니면 도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 미묘한 차이는 물론 실력에 의거하기도 하지만 심사자의 취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결국, 당락은 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2)

그래서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선호하는 신문사가 따로 있게 마련이고, 더 정확하게는 심사자에 대한 준비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필자가 심사소감을 일별하고 종합해본 결과 객관적으로 드러난 심사경위로서는 신문사, 심사자 간의 차이를 구분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심사자의 문학적 세계관이나 작품 세계를 통해 그 선호성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합종연횡하는 심사자의 연대상황이 매년 조금씩 다르고 한 사람이 여러 신문의 심사를 동시에 맡기도 할 뿐더러 세태에 따라 시의 경향도 조금씩 달라지는 상황에서 신문사마다 고유한 색깔이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심사평이란 것이 시 창작의 기본원리를 당락 작품에 개괄적으로 적용하는 형식이고 보니 더욱 그렇다.  따라서 심사의 경향을 유추해낸다는 것은 당선작의 유형을 분석하는 것으로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겠고, 그것은 시대에 따른 심사의 추이를 헤아리는 것으로 나타나겠다. 설령, 심사위원의 성향을 추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특징적인 몇몇 심사위원의 경우에 국한할 수밖에 없고 그것도 신뢰도가 높다고는 할 수 없다.3)

삼십여 년의 심사소감들을 훑어보는 것은 상당한 품을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할 것 같은 심사의 경향이란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간단하게 정리된다. 
첫째는 창작행위의 정직성과 관련한 것이다. 체험에 대한 진솔한 반추와 그것에서 우러나오는 절실한 고민이 창작의 바탕이 되어 있는가를 가늠하는 것은 심사의 기본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은 작품에 투영된 작가의식, 혹은 시를 생산하는 작가의 정신자세를 우선 대면하게 되는데 주제를 대하는 태도나 주제가 다루어지는 방식을 통해 창작의 주체가 머리냐 가슴이냐를 분별하게 된다. 진솔하고도 치열한 생각만으로 반드시 탁월한 표현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정직하고도 절실한 고민 없이는 절대로 빛나는 표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창작 행위의 정직성은 작품의 성패와 관련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상투적인 주제의식이나 표현의 과욕은 빈틈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심사자들은 그 허점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둘째는 형식과 관련한 것으로서 단연 표현의 유형화에 대한 경계가 압도적이다. 우선 심사자들은 구성이 허약하거나 산만하여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를 큰 결함으로 지적한다. 또한 설명이나 요설처럼 긴장이 떨어지는 표현도 자주 거론하는 낙선요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보다 빈번하게 강조하는 것은 ‘신춘문예용 시’의 유형화된 작법에 대해서이다. 이 부분에서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신춘문예는 새로운 작가를 배출하는 행사이므로 기성시의 기법을 흉내내거나 모방하는 것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병적인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심사자들은 응모자들에게 패기와 도전정신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요구한다. 이것이 심사 경향의 세번째 특징이다. 다소 미숙하더라도 참신하고 신선한 작가정신을 높이 사겠다는 이 선언은 신춘문예의 대표적인 심사기준이라고 하겠다. 이 기준은 다소 포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주제적인 전략보다는 형상화 전략을 심사하는데 강도 있게 적용된다. 유형화된 작법에 대한 심사자들의 거부감이 새로운 시정신의 기대로 나타난다. 상투적인 수법으로 잘 다듬어진 완성도가 높은 시와 다소 미숙하더라도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의 방식을 추구하는 의욕적인 시의 택일을 두고 결국 후자에 손을 들어주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신춘문예의 심사가 첫째 진솔함, 둘째 유형화되지 않은 표현, 셋째 신인다운 패기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결과라 하겠다. 그러므로 응모자들은 무엇보다도 기성의 시작법에 기대거나 변용 혹은 재생산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당선시들의 시대별 경향과 변화양상은 심사의 그것에 비해서는 쉽게 감지된다. 일반적으로 70년대의 당선시들은 우선 주제의 규모가 방대하다는 특징이 있다. 후대의 경향에 비해서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우주>, <세계>, <신神>, <허무>, <순수>, <모순> 등과 같은 관념어들의 포진이 눈에 많이 띄는 것도 세상과 자아의 철학적 탐구라는 주제 전략과 관련이 있다. 취재된 사물들도 대개 추상적 상징의 기표로 기능하는 편이다. 화자의 관념적 진술이 형상화의 주종을 이루고 있으므로 시는 사변의 진중함에 압도된다. 이는 전통 서정의 재래적 감수성을 진부한 감상으로, 외부적 사태에 대한 관심을 피상성으로 간주하는 당대의 심사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김명인의 「출항제出港祭」(1973년 중앙일보)가 보여준 미려한 수사와 세련된 리듬, 혹은 장석주의 「날아라, 시간時間의 포충망捕蟲網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夢想이여」(1979년 조선일보)에 담겨 있는 강렬한 이미지는 다음 세대의 출현을 예고하기도 한다.

80년대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1981년 중앙일보)와 남진우의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연습」(1981년 동아일보)의 두 이질적인 상상력이 대결구도를 보이며 시작하는 듯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사평역」의 서정적 상상력이 판정승을 한다. 재래적인 감수성에 구체적인 현실이 접목되면서 전통 서정시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구체적 일상에 토대를 둔 삶의 애환이 신선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으로 형상화된다. 즉, 스케일이 작아지면서 나름대로 내적인 단단함, 구체적인 소재에서 오는 생생하고도 단단한 느낌이 고도로 정련된 표현으로 제시된다. 물론 80년대의 우울하고 어두운 정서는 당연히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밀접하게 닿아 있는데 특이한 것은 현실의 세목들을 잡아내는 세련된 수사들이 난무(?)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80년대 당선작의 경향은 대부분의 심사판도와 관계가 있겠지만 현실의 구체성과 그것의 서정적 변용을 특히 중시하였던 황동규의 활약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90년대로 이어지면서 또 다른 양상을 낳는다. 90년대도 80년대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구체성에 대한 관심이 당선시의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80년대가 시대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상력을 보여준 것에 비해 90년대에는 개인적 상황에서 도출된 삶의 양상이 시적 상상력의 중심이 된다. 70년대의 도저한 관념이나 80년대의 미려한 수사는 일상에 대한 진솔하고도 따뜻한 애정으로 대체된다. 비록 서투르더라도 수사보다는 진솔함, 화려한 완성도보다는 가능성을 잠재한 참신함이 미덕이 된다. 문화세태에 연루한 관심도 급부상하지만 대체로 일상적 삶에 관한 세밀한 관찰, 주변의 사물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주류가 해체되고 다양한 관심과 신선한 상상력이 우대받았던 90년대는 어찌 보면 신춘문예의 소강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은 9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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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짐과 현상은 우리 시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전대에서 간혹 비추던 강렬한 이미지들이 근래에 와서는 형상화의 주요한 덕목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더구나 언어나 형식을 압도하는 개성적인 상상력이 이미지 창출을 주도하면서 안정감보다는 가능성이 심사의 최종기준이 되기도 한다.

절실하고도 심도 있는 생각이 제대로 된 표현으로 드러날 때, 즉 주제적 전략과 형상화 전략의 제휴가 극대화될 때 시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물론, 시쓰기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의 전략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구분해 본다면, 이전의 시들에 비해 최근의 당선시들이 보여주는 특징적인 성향은 형상화 전략이 주제적 전략에 비해 돋보인다는 점이다. 과거 대부분의 시들에게 있어서 특정한 주제를 해석하는 기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면 요즘의 시들은 주제적인 전략보다는 현실의 특정한 징후들을 감각적으로 제시하는 기능이 우세하다. 제시의 기능은 현상을 파악하는 개성적인 상상력을 토대로 한다. 그러므로 주제가 다소 상투적이더라도 시적 대상을 장악하는 솜씨가, 엉뚱하지만 참신한 상상력으로 발현이 된다면 심사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 강화될 전망이다. 잘 짜여진 구조, 유려한 수사, 철학적인 사유보다는 사물과 상황에 대한 작지만 따뜻한 애정, 게다가 새로운 감성과 색깔 있는 언어들이 주목을 받을 것이다. 더욱이, 살아 있는 상상력과 감각적인 이미지, 그리고 이미지를 운용하는 인상적인 형상화 능력이 당분간은 풍미하리라는 예상이다.

이 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신춘문예가 더 이상 아마추어들의 경연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대시의 판도와 동일한 궤를 그리고 있는 신춘문예의 변화는 시류의 첨예한 척도이자 첨병을 자임하는 이 제도의 역할을 입증한다. 따라서 새로움에 대한 추구라는 절대명제 아래 새로운 내용과 형식에 대한 탐구는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신인의 새로운 면모’라는 목표는 늘 움직이고 있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1) 당선시들과 심사소감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낙선자의 명단에 쓸쓸히 들어있던 많은 낯익은 이름들을 보는 것이었다. 80년대 후반에 등장해 90년대를 풍미하고도 아직까지 많은 문청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기형도도 82년부터 84년까지 내리 낙선하다가 85년에야 동아일보에 「안개」로 등단하였다. 물론, 그가 결선에 오른 경우와 필명을 쓰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문단의 중진이 되어 있는 시인들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나 화려하게 등장했던 당선자의 이름이 지금까지 유효하지 않은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작의 진정한 길이 신춘문예의 화려함 속에 비수처럼 숨어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2) 신춘문예 同時 당선으로 유명한 오태환의 경우가 재미있다. 그는 84년 조선일보에 「癸亥日記」로, 같은 해 한국일보에 「崔益鉉」으로 등단하였다. 그리고 그해, 서울일보에는 낙선을 하였다. 낙선의 이유는 “요설적인 데가 흠이 아닐수 없었다”(구상, 황금찬)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신문의 당선작에 대한 평가는 “시정신 자체가 응분의 수련을 거친 중후성과 높은 울림을 보여주고 있다. 기법 역시 시류에 현혹된 손끝의 것이 아닌 충분히 개성적인 것으로 보였다”(조선-박두진, 조병화)거나, “(…)매우 언어의 결구가 다부지고 느낌의 결이 고울 뿐 아니라 꽤 넉넉하게 버틸 줄도 아는 언어 질서의 묘를 터득한 듯이 보였다. (…) 가성의 잔재주를 스스로 경계한 채 하나의 진실을 의젓하게 진술해 나가는 자세가 도한 믿음직스러웠다”(한국-권일송, 이근배)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방식에 대해 ‘중후성’과 ‘울림’을 갖춘 ‘개성’으로 볼 수도 있고, “하나의 진실을 의젓하게 진술해나가는” ‘언어질서의 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취향에 따라서는 그러한 표현 방식이“요설”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해 한국일보에서 오태환에게 당선의 자리를 내준 이승하는 중앙일보에 기형도의 「겨울판화」를 제치고 당선되기도 하였고, 정호승의 「첨성대」는 73년 한 신문사에서는 童詩 수준으로 면박 당하기도 하지만(중앙-김종길, 김현승) 우리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살린 군계일학의 작품(박목월, 박재삼)으로 대한일보에 당선되기도 한다.
 
3) 시대별로 살펴보았을 때, 대체로 70년대의 심사의 판도는 박목월, 박남수, 김현승, 서정주, 박두진, 김종길, 조병화가 중심이며 거기에 많은 시인 평론가들이 가세한 형국이다. 그리고 70년대 중반부터 김우창의 등장이 빈번해진 것도 특징적이다. 80년대에 들어서서 박목월, 박남수, 서정주, 김현승 등이 사라지거나 뜸해진 반면 단연 김우창, 황동규의 활약이 눈부시다. 여기에 80년대 후반부터 가세하여 90년대로 이어지는 신경림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90년대 이후부터는 다양한 심사자들이 등장하는데 그 와중에서 김우창, 김종길, 신경림, 황동규는 여전히 여러 신문의 심사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신문사 별로 특징적인 것은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십여 년 동안의 심사를 박두진, 조병화가 독점하다시피한 조선일보의 양상이다. 이 양상은 90년대로 오면서 황동규가 이어받는다. 황동규는 80년대의 중앙일보의 단골이었으며 마찬가지로 80년대 동아일보의 김우창, 90년대 서울신문의 김종길, 90년대 한국일보의 신경림 정도가 달골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구도는 다양한 심사자들의 가세로 해체되어가는 분위기이며 신문사의 색깔을 가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다만 몇 몇 심사자의 특징적인 심사경향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박두진과 조병화는 투철한 시정신의 정립과 탐구라는 명분으로 심사를 하였는데 어둡고 허무적이며 다소 현대적인 시보다는 건강하고 긍정적인 상상력을 중시하였다. 한국적인 서정과 일상적 생활에 애정을 드러낸 시를 높이 샀다. 더구나 그들은 모국어의 독특한 매력을 관심있게 보았는데 이는 율격적인 측면을 많이 고려하였다는 뜻이다. 일상성과 전통적 율격을 높이 사기는 서정주도 마찬가지였는데 가끔 그는 솔직 담백한 소품을 뽑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황동규로 이어진다. 황동규는 스케일이 작지만 구체적인 느낌과 생각에서 오는 단단함을 중시한다. 황동규의 이러한 성향은 80년대 후반으로 올수록 강해져서 발상이 참신하고 고민이 진솔하다고 느껴지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다소 엉뚱한 시를 선하기도 한다. 김우창의 경우는 황동규와는 다르다. 그는 일상생활의 섬세한 서정을 감상적인 자기 위안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당대 현실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 시대적인 이해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형이상학적인 정서에 기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의 구분은 편의적인 것이 불과하다. 경우에 따라서 의미 있게 활용할 수도 있지만 무의미할 수도 있다. 

심재휘  1963년 강릉 출생.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저서 『한국현대시와 시간』   
            2002년 제8회 <현대시 동인상> 수상.
 
2. 신춘문예 제도의 역기능과 순기능
일회성의 경쟁 원리를 극복하기

                                                         이  경  호 | 문학평론가

대중 전파력이 큰 언론기관에서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진흥과 보급에 관심을 쏟고 직접 참여하는 일이 공익성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 일은 적극적으로 장려할 만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신춘문예> 제도는 오랜 기간 동안 이러한 문예진흥의 공익성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그 존재 가치가 널리 유포되고 주목할 만한 성과를 집적해 왔다. 그 제도는 무엇보다도 문학의 향수층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키거나 보존하면서 우수한 문학 생산자들을 발굴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 

반 세기를 훨씬 넘는 연륜을 쌓아오는 동안 이 제도는 특히 대중문화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진지한 고급문화예술의 위엄과 존재 가치를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존립 근거를 간직하고 있다. 새해 첫날에 일간지의 몇 개 지면을 동시에 할애하여 문단에 첫발을 내딛는 신인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해주는 일은 문학이 여전히 문화예술의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게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문학에 투신하려는 열정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가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 읽기보다 작품 쓰기에 대한 열의를 집중적으로 진작시킬 뿐만 아니라, 문학을 <일회성 겨루기>의 대상으로 삼는 마음가짐을 대중들에게 세뇌시키는 역할을 해온 점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작품 읽기는 물론이고 작품 쓰기에 있어서도 경쟁으로서의 성과보다 스스로 즐김을 통한 수련의 몫이 더 중요하고 근원적이라는 사실을 <신춘문예>가 일깨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다소 과장된 비유를 들어보면 <신춘문예>는 마치 옛날의 과거시험이나 현재의 국가고등고시 같은 제도를 상기시켜 준다. 전자의 제도는 봉건적인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을 재생산하고, 후자의 경우도 식민지 사회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정 전문가를 배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점을 돌이켜보면, 문학이나 예술 생산의 속성이나 보람과 크게 대별되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문학이나 예술이 권력을 쟁취하거나 전문 기능을 보증하는 자격증 역할에 자족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러한 역할에 저항하거나 역할을 갱신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예술은 미완의 진실을 추구하기 위하여 기존의 권력이 만들어 놓은 질서와 그것이 쌓은 성과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미완의 진실을 추구하기 위하여 문학이나 예술은 자유로운 삶과 새로운 미학의 원리를 표현하려 한다.

그러므로 공모된 문학작품을 평가하고 심사하는 자리에서 늘 고초를 겪으며 난망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작품들의 속성과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개성과 다양한 진실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심사위원의 편협한 입맛에 따라 함부로 취급해 버릴 수 있는 태도의 무망함을 뼛속 깊이 실감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춘문예>처럼 엄청나게 많은 응모자들이 투고한 작품의 분량을 겨우 하루라는 짧은 시간 안에 검토하고 선별해야 하는 심사의 관행은 심사의 효율성과 공정성에서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수천 편의 응모작품을 겨우 몇 시간에(점심 시간을 제외하면 그렇다) 읽어내고 본심에 올릴 십여 편의 작품을 선별해 내거나, 아예 예심도 없이 바로 당선작을 뽑아내는 심사과정은 ‘주마간산走馬看山’의 원리를 절실하게 체험 학습하는 보람을 안겨줄 수 있을 따름이다.

개인이 몇편씩 응모한 작품 중에서 첫 작품의 단 몇 행을 검토하고 응모작 전체를 평가해버려야  하는 ‘속성 심사’의 관행은 <신춘문예> 심사위원의 초능력을 암암리에 요구하는 기준으로 전락해버린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를 주관하는 각 일간지의 문화면 기사는 <신춘문예> 공모 접수가 마감되거나 예심이 끝나면 응모자 수의 크기와 응모편수의 분량을 홍보하기에 바쁘다. 그러한 태도는 마치 더많은 작품을 더 짧은 시간 안에 심사해야 하는 심사위원의 고충을 자랑하거나, 그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심사의 불성실과 불공정성 문제를 사방에 선전하는 것 같아서 착잡하기만 하다. 

이런 문제점들을 살펴볼 때 이제는 <신춘문예> 제도의 시행 취지를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그것의 존립 근거를 찾아내 합리적이며 공정한 시행 방안을 마련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신춘문예>가 제정된 시기가 일제 식민지 시절이고, 따라서 문학예술의 교육과 진흥을 주체적으로 자유스럽게 추진할 만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기 어려웠던 시절에 <신춘문예> 제도가 시행되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이제는 독립국가로서 문화산업을 가장 부가가치가 큰 투자분야로 생각하는 21세기의 우리네 현실 속에서 <신춘문예> 제도가 갖는 공익성의 근거가 크게 변화되었다는 판단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제 <신춘문예> 제도는 문화산업을 주도하는 대중문화 속에서 본격문학의 위상과 가치를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 하는 문제를 외면해버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만약에 본격문학을 대중문화나 그것을 주도하는 영상매체와 접합시키는 것이 필요한 변화의 방향이라면 <신춘문예> 제도 또한 신인 발굴을 위한 응모 분야부터 <시>와 <소설> 중심이던 기존의 관행을 과감하게 수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대중문화나 영상매체와 길항의 관계를 갖는, 다시 말해 문화산업의 권력이나 가치 기반을 장악하고 있는 대중문화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역할로서 문학의 위상과 가치를 지원하는 <신춘문예>의 존립 근거를 인정한다면, 응모 분야를 개선하거나 그것의 대중적 홍보가치를 창출하려는 의욕을 앞세우기보다는 그 제도가 수십 년 동안 운영되면서 누적된 문제점들, 공모와 심사과정은 물론이고 발굴된 신인들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누적된 문제점들을 과감하게 개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소략하게나마 그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공모 시기부터 조정할 필요가 있다. 서울의 일간지와 지역 신문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연말로 공모 마감시기를 일관되게 고정시켜 놓는(중앙일보의 경우는 예외이며, 이 점에서 중앙일보가 공모 마감을 매해 9월로 변화시킨 조처는 시의적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실시 방안은 이 제도의 명칭과도 어울리지 않으며(신년 초에 당선자를 발표하는 현재의 방침을 제목에 반영한다면 <신년문예>나 <원단문예>쯤이 될 것이다), 응모자들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곳에 투고하는 편법 응모와 연말이 다가와야만 창작에 몰입하는 좋지 못한 습관을 낳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한 신문사에서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누어 작품을 공모하거나 신문사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작품을 공모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함으로써 사시사철 본격문학에 대한 대중들과 문학 지망생의 관심이 유도될 수가 있고, 응모작의 규모도 고르게 분산되어 심사과정의 부담이 감소됨으로써 심사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도모하는 데 기여할 수가 있다.

보다 중요한 문제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공모 분야이다. 현재 각 신문사마다 대략 12월초에 내보내는 공모 광고에 소개되어 있는 공모 분야는 시와 소설, 희곡을 포함한 10여 가지 안팎으로 나뉜다. 시와 소설만 집중해서 공모 분야를 한정해놓고 있는 곳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사마다 특화된, 혹은 개성적인 <신춘문예>의 컬러를 확보하고 있는 곳은 없다. 그것은 공모 분야가 유사하고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공모 분야의 수를 한정하거나 전문화한다면 각 신문사마다 특화된 <신춘문예>의 입지를 마련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예로 든다면, 전체 응모 분야를 시로 한정하되 시 분야를 장르별로 세분하여 <서정시>, <서사시>, <시조> 등으로 나누든지, 아니면 표현기법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서정성을 고수하는 시와 실험적인 개성이 돋보이는 시의 영역으로 나누든지, 그도 아니면 주제별로 나누어 공모 분야의 특징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각 일간지 <신춘문예>의 개성도 확립될 뿐더러 심사과정에서도 새로운 개성과 다양한 삶의 진실을 표현한 작품들이 세밀하게 평가받는 기회를 확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공모자들은 자신의 개성이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투고한다는 이점도 누릴 수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심사기준과 심사위원의 선정, 그리고 심사과정의 문제점이다. 현재 대부분의 <신춘문예>를 주관하는 일간지에서 마련해놓고 있는 관행은 <시>와 같은 특정분야 전체를 포괄하는 심사기준이며, 대체로 매해 크게 바뀌지 않고 반복되는 심사위원의 선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 하루의 몇 시간만에 검토하고 선정해야 하는 심사과정이다. 공모 분야가 세분화되지 않았을 경우에 개성이 뚜렷한 상상력과 언어의 표현능력을 제시하는 작품들을 주마간산의 독해과정에서 찾아내기는 어렵다. 또는 첫 작품보다 두번째 응모작품이 우수한 경우에도 첫 작품의 불과 몇 행만을 읽고 작품의 가치를 평가해버리는 현재의 심사 관행에서 올바른 평가를 받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필요한 방법은 응모 분야를 세분화하고 그에 적합한 심사위원을 선정하여 심사를 맡기는 것이지만, 그게 어려울 경우에는 다양한 문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문인들로 구성되는 심사위원단의 숫자를 늘리고, 심사기간을 충분하게 보장해주는 것이다. 심사에 정실이 개입되지 않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매해 심사위원을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심사위원 명단을 사전에 공개하여 그 사람의 시를 택하는 안목에 동의하는 공모자들이 그 신문의 <신춘문예>에 응모할 수 있는 기회를 부과하는 것도, 각 <신춘문예>의 개성을 확립하고 심사위원의 책임감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춘문예>의 문제점은 당선자를 배출하는 공모와 심사과정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관행으로서 <신춘문예>가 간직하고 있는 약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이 ‘일회성 행사’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바, 이러한 성격은 <신춘문예> 응모자들의 기대와 당선자들의 실망감이라는 괴리 현상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신춘문예> 응모자들은 대부분 화려한 등단의 결실(그것에 상금도 포함될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면 시인이나 작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많은 곳에서 원고 청탁을 받게 되고, 몇 년 안에 작품집도 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미 <신춘문예>로 등단을 해본 문인들은 그러한 기대감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신춘문예> 출신에게 문단에서 특별한 주목과 기대감을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원고 청탁이나 작품집 출간의 기회를 마련하기도 어렵다.
 
그러한 경우에 <신춘문예> 출신은 문예지로 등단을 한 신인들보다도 오히려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 이제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문예지들은 자기 출신 문인들에게 원고청탁이나 작품집 출간의 우선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춘문예> 출신들은 작품발표나 작품집 출간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유수한 문예지에 작품을 투고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나 자신의 작품이 문예지 편집자의 눈에 들기를 기대하면서. <신춘문예> 출신이 겪어야 하는 이러한 어려운 처지는 모두 <신춘문예>가 ‘일회성 행사’의 성격을 갖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에 전국의 일간지들이 <신춘문예>를 단순히 공모와 시상으로 끝내 버리는 지금까지의 전통을 버리고 좀더 지속성을 갖는 문예진흥제도로 탈바꿈시켜 놓는다면 <신춘문예> 출신들 또한 자긍심을 갖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속성을 갖는 문예진흥제도로 <신춘문예>가 탈바꿈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번째로 『신춘문예 당선작품집』을 소책자로 발간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가 있다. 각 분야별로 당선작품과 심사평, 당선소감은 물론 당선자의 신작까지 수록한 문집을 발간하여 전국의 도서관이나 문예창작학과를 비롯한 문화예술 관련부서에 배포함으로써 <신춘문예>에 대한 관심을 진작시키고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는 열의를 북돋을 수가 있을 것이다. <신춘문예>를 주관하는 언론사들이 이러한 역할과 책임을 방기하는 바람에 세간의 출판사들이 부분적으로 이 업무를 대행하고 있으나, 그것이 문예진흥에 미치는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두번째 방법으로 요즘 들어 신문마다 매일 게재하는 시편 소개란에 본지 <신춘문예> 출신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도 고려할 수가 있다. 이러한 방법은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갖기 어려운 <신춘문예> 출신들을 격려하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그리고 <신춘문예>가 시행되던 초창기에 각 신문사가 자사 출신들에게 과감하게 지면 발표의 기회를 제공했던 선례를 살펴보면 <신춘문예>를 제정하게 된 문예진흥의 취지가 츨신자들의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지원하는 일에서 비롯된 점도 입증될 수가 있다.
세번째로 <신춘문예> 출신과 각 문예지가 공모하는 <신인상> 출신을 비교 평가하는 지면을 마련하는 것도 <신춘문예> 제도를 보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의미로운 까닭은 신인을 가려내는 심사기준이나 작품의 수준과 개성을 비교평가하는 객관적인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세간에서 자주 잡음을 불러 일으키는 신인 배출의 문제점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삼을 수도 있고, 아울러 <신춘문예> 출신 신인들을 문예지에 홍보하여 지원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신춘문예> 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것을 개선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방법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면이 제한되어 있어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이 제도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가치 있는 문화예술의 진흥과 보급에 미치는 홍보효과가 큰 만큼, 현재 단계에서 제도의 낙후된 관행과 시행의 여러 문제점을 빌미로 <신춘문예>의 존폐를 논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노출한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보완한다면,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일회성 겨루기>에만 치중하는 현재의 운영 취지와 실천 방안을 <스스로 즐김을 통한 수련의 몫>을 존중하는 운영 취지와 실천방안으로 변화시켜 놓을 수만 있다면 본격문학의 <씨앗뿌리기 축제>로서 <신춘문예>가 지금까지 쌓아온 결과들은 국민문화예술의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경호  1955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고려대 영문과, 동대학원 비교문학 박사과정 수료. 현재 광주여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작가세계》 주간. 저서 『문학과 현실의 원근법』, 『문학의 현기증』
 
 
신춘문예 제도의 성립과 현재적 의의

                                                           이  명  원 | 문학평론가

신춘문예 제도는 근대문학과 근대적 문학제도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것은 문인들의 자기 규정, 즉 중세적 문사文士형 지식인으로부터 문인文人=예술가라는 근대적 자기 정체성의 확립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춘문예를 포함한 문인등단 제도는 중세적 문인관료 선발방식인 ‘과거제도’의 무의식적 잔존물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변화된 근대세계에서 문학과 현실정치가 차별적인 장場의 질서를 획득하고 분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근대문학이 기술적인 차원에서 인쇄술의 발달에 따른 출판 및 저널리즘의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술적·사회적 배경 아래서 근대문학의 생산·유통·소비 구조가 확립되었고, 문학장이라는 자율적 공간이 형성되면서 신문이나 잡지에 원고를 발표하고 원고료를 받는 ‘저자’, 즉 근대적 문인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최초의 근대적 문인이라 평가받는 이광수의 경우를 보더라도, 문인됨의 자격을 부여하는 등단제도에 대한 자의식이 뚜렷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것은 1920년대 초반의 《창조》, 《폐허》, 《백조》와 같은 이른바 ‘동인지 시대’의 문인들에게까지 유효한 판단이겠거니와, 이들 문인들은 그들이 유학했던 일본의 다이쇼明治 교양주의의 세례 속에서, 근대문학과 근대문인의 자기-정체성을 체화體化해 나가긴 했지만, 문인됨의 자격을 부여하는 ‘등단제도’ 따위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재동경 유학생들의 기관지인 《학지광》의 필자들이 종래에는 한국 근대문학 초기의 문인사회를 형성했던 것은 이런 점에서 필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오」(1916)를 읽어보면, 이 시기에 이르러 종래의 문학관을 폐기하고 구미의 Literature의 역어譯語로서의 새로운 문학관을 취하고자 하는 자기의식이 성립되고, 이에 따라 미분화되었던 사상과 예술이 지知, 정精, 의義로 섬세하게 분화되는 양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이 염상섭의 「개성과 예술」(1922)에 이르면 또다시 진眞, 선善, 미美의 삼분법 아래, 예술을 개성의 산물로 파악하는 칸트 식의 미적 자의식이 성립되면서, 근대적 문학인식이 보다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근대적 문인선발 제도로서의 신춘문예가 형성되는 시기는 근대적 문학의식이 조선의 문인사회에서 일정하게 보편성의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시기, 그러니까 대략 192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기는 3.1운동을 통해 조선민중의 저항의식에 위협감을 느끼게 된 일제가 무단통치로부터 보다 교활한 통치형태인 문화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조선에서의 문화주의적 실천의 공간이 넓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1)

근대적 문학제도의 형성에 대해서는 이미 몇몇 연구자들의 성실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거니와, 신춘문예의 효시로는 《매일신보》가 1914년에 실시한 <신년문예모집>(1914. 12. 10)을 거론할 수 있다. 《매일신보》는 운문과 산문,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장르를 현상공모하고 다음 해 1월 1일에 당선작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이후 신춘문예의 일반적인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매일신보》는 1919년에 <신년현상공모>를 내면서 ‘신춘문예’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이어받아 사용함으로써, 급기야 ‘신춘문예’라는 용어가 한국적 문인등단 제도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매일신보》의 뒤를 이어 《동아일보》가 1924년에 <현상문예대모집>을 통해 문인선발을 시작했고 1925년에 이르러 그 명칭을 ‘신춘문예’로 바꾸었거니와, 같은 시기에 《조선일보》도 신춘문예를 시행함으로써, 신춘문예를 통한 문인등단제도가 《개벽》과 《조선문단》과 같은 잡지의 신인추천제도와 함께 제도화된 문단 등용문으로서의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신춘문예를 통한 신인선발 제도의 시행은 근대문학의 성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첫째, 신춘문예 제도를 통해서 근대적 직인職人으로서의 문인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거의 유학자나 선비로 지칭되는 통합적 지식인이 아닌 예술적 장인으로서의 자기의식이 제도를 통해 더욱 뚜렷한 형태로 생성되게 된 것이다.

둘째, 신춘문예 제도를 통해서 사회영역과는 분리된 문단이라는 자율적 장場의 질서가 더욱 공고화하게 된다. 신춘문예는 신인선발 제도이다. 때문에 선발의 주체인 선자選者의 권위가 제도를 통해 확립되기 마련인데, 상징적인 권위의 성립과 이에 대한 승인이 제도화됨으로써 문단질서가 비교적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신춘문예 제도의 성립을 통해 한국적 문학 저널리즘이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문이 문인을 선발하고 문학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것은 일제 식민지 당시의 인텔리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공간이 신문과 출판을 제외하고는 찾을 수 없었던 당대적 상황의 한계성에서 온 현상일 것이다.

넷째, 신춘문예 제도를 통해 근대문학의 이념이 비교적 뚜렷하게 재생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춘문예는 문인을 선발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인들이 견지해야 될 문학의 관점이나 태도를 내면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선작을 뽑으면서 심사위원들이 제시한 심사평들은 당대의 문학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문학에 대한 사유의 편린이면서, 동시에 향후 신진문학인들이 추구해야 될 문학적 규율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신춘문예 제도가 현상모집의 형태를 띠었던 까닭에, 문학이 예술적 노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비교적 확고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신춘문예의 성립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그것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80여 년에 이르는 전통을 갖고 있는 신춘문예는 오늘날에도 많은 문학지망생들이 선망하는 유력한 등단제도로 남아 있다. 《한겨레》와 《국민일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앙일간지가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전통 있는 지방일간지 역시 신춘문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물론 《중앙일보》처럼 신춘문예 제도를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명칭 및 공모일을 변경하여 시행하는 신문사도 있지만, 신문에 의한 문인선발 제도는 과거와 별 차이 없이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적 흐름을 반영하기 위해 《스포츠서울》과 같은 스포츠신문은 이른바 하위문화로 규정될 수 있는 장르를 공모하는 독특한 형태의 신춘문예를 시행하고 있고, 《오마이뉴스》와 같은 인터넷 신문은 계간지 《실천문학》과 공동으로 ‘인터넷 신춘문예’를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기는 했지만 신춘문예 제도에 대한 언론사의 의지는 확고해 보이며, 신춘문예 응모자의 수 또한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현재의 신춘문예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어 주목된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①신춘문예 제도는 뚜렷한 미덕을 갖고 있는 신인선발 제도이므로 전통을 이어 나가자는 주장, ②신춘문예 제도의 의미를 존중하기는 하되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 ③신춘문예 제도는 현재 시점에서 폐지해야 마땅하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①의 경우는 많은 수의 문인과 독자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수준의 논의이므로 이 자리에서는 별도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②와 ③의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우선 ②의 문제를 논의해 보기로 하자. 현행 신춘문예 제도를 개선하자는 주장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신춘문예 당선작이 신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신인을 선발하는 제도라면 응당 신인에 걸맞는 패기와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당선되어야 할 텐데, 실제로 당선된 작품들을 보면 이른바 ‘신춘문예용’으로 명명할 수 있을 정형화된 작품들이 대부분이라는 비판이 빈번하게 제기된다. 백지연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참고할 수 있겠다. “기성의 문학관습과 규범은 등단절차를 통해 확인되고 재생산된다. 신인들이 글쓰기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최신 유행에 민감해지는 것도 당연한 결과다. 등단은 기성문단의 구조적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새로운 글쓰기의 욕망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제도가 되었다.”2) 인용한 글의 제목은 「관리와 통제의 관문」이다. 신인등단 제도인 신춘문예 제도가 오히려 신인들의 발랄한 상상력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는 주장은 관점에 따라 다소 급진적인 시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이 그러하니 놀랄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먼저 제기할 수 있는 답변은 신춘문예 제도의 노후화 현상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이 현실의 발목을 잡은 형국이다. 신춘문예 제도가 시행된 지 80여 년에 이르다 보니, 시대에 따라 등단작의 편차나 경향이 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고 할지라도, 대개는 정형화된 패턴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문학지망생들에게도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최근처럼 『신춘문예 당선작품집』과 같이 신춘문예의 경향을 일목요연하게 검토할 수 있는 책들이 다수 출간됨에 따라, 응모자들이 기당선작의 경향을 답습하는 일도 늘고 있다. 심사위원들의 문제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을 검토해 보면 알겠지만, 거의 매해 한정된 문인들이 신춘문예 심사를 맡고 있다. 어제의 심사위원이 오늘의 심사위원이고, 한 문인이 2개 이상의 신춘문예를 중복심사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게다가 각각의 신문사들은 거의 매해 동일한 심사위원들을 위촉한다. 게다가 이들 문인들은 대개가 60대 이상의 중견급 문인들이다. 신춘문예가 ‘회춘문예’가 되지 않으려면 심사위원의 연령대도 섬세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신춘문예 응모자들은 예상 심사위원들의 문학적 성향을 고려하면서, 실험적이기보다는 따분하기는 하지만 등단을 위해서라도 정형화된 작품을 써내려가기 마련이다.

위의 두 가지 사실과 함께 대학교육의 문제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90년대를 경과하면서 전문대학뿐만 아니라 4년제 대학에도 문예창작과가 폭발적으로 신설되었다. 기존의 문학지망생의 배출창구였던 국문학과는 커리큘럼의 대부분이 문학사의 연구와 관련된 것으로, 사실상 국문학과 재학생이라고 할지라도, 문학지망생은 극히 소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예창작과의 신설이 가속화되면서, 문인을 직업이자 최상의 목표로 선택하고자 하는 문학지망생들이 대거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문예창작과의 커리큘럼이 창작실습 위주로 구성되고 이 학과 재학생들의 목표가 등단으로 고정됨에 따라 문학창작의 근원적 토대가 될 심원한 사유나 세계관의 정립보다는 기법의 수련에 집중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2002년 신춘문예 당선자의 출신학과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소설의 경우는 당선자의 70%가 문창과 출신이었고,3) 평론의 경우는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자의 100%가 문예창작과와 국문과 출신이었다.

위에서 제기된 문제점을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면서 현행 신춘문예 제도를 보완해 나가자는 견해도 있지만, 아예 신춘문예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 낫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겠다. 첫째, 신춘문예가 아니더라도 현재의 문단에는 다양한 신인선발 창구가 있기 때문에, 신춘문예 제도가 예전처럼 절실해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오늘날 문인이 되는 길은 매우 다양하다. 문예지의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는 것, 단행본을 출판함으로써 활동을 시작하는 것, 동인활동을 통해 등단하는 방법 등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문인들이 신춘문예 이외의 방법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게다가 요즘처럼 문예지가 200여 종에 이르고, 매 계절마다 신생문예지가 경쟁적으로 창간되는 시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4)

둘째, 신춘문예 제도가 ‘일간지 프리미엄’으로 표현할 수 있을 법한 문학적 허위의식을 형성할 수 있으며, 기성문단의 권력 편중현상을 고착화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5)

이러한 주장 가운데 ‘권력 편중현상’이라는 문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춘문예 심사에 참여하는 심사위원들은 많은 경우 기성문단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문인들이다. 이들이 심사를 통해서 선발한 신인은 심사위원과 문학적 사제관계의 위치에 처해지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기존 문단의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언론의 문인선발권에 대해 발본적으로 회의하는 시각도 제출되고 있다. 언론과 문학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고, 또 한국문학이 언론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장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오늘날과 같이 언론이 사회의 전영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한 상황에서, 문인선발권을 언론에 양도하는 행위는 문학의 종속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6)

이러한 관점은 신춘문예에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조선일보》에서 시행하는 <동인문학상>이나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과 관련해서도 제출된 바 있다.

지금까지 검토해 온 것처럼 신춘문예가 문학사적인 기여를 해온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제도의 탄력성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우려 역시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번쯤 진지하게 제기해야 될 문제는 도대체 문인됨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신춘문예 제도와 같은 신인등단 제도란 결국 문인됨의 자격을 둘러싼 제도적 승인투쟁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이 지구적으로 보편적인 제도인가 하면,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우리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우리와 같이 언론사가 주관하는 신춘문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으로 신춘문예 제도가 한국적 문학제도의 자랑할 만한 전통으로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엄격하면서도 보수적인 제도가 문학에 대한 대중들의 접근통로를 상대적으로 제약하면서 문학에 대한 신비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임의적인 기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적어도 외형적인 이미지만을 고려하자면 신춘문예는 조선조의 과거제도를 연상시키며, 사법고시를 포함한 국가고시가 뿜어내는 미묘한 신분상승의 아우라마저 거느리고 있다. 그 때문일까. 몰락한 문학이 초라하게 문화계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신춘문예에 대한 대중들의 시선은 여전히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몽상가의 표정을 닮아 있다.
개인적인 고백을 덧붙이는 것도 가능할까. 10년 전, 평론가가 되었다는 당선통보를 받던 날, 나는 뛸 듯이 좋아한 것이 아니라 어리둥절해 했다. 그깟 원고 한 편이 ‘문학청년’인 나를 ‘문인’으로 만들 수 있다니. 순간 문학은 사기라는 어느 선배 시인의 농담이 떠올랐다. 모든 제도는 그것을 신성시하게 만드는 마술적 기제를 갖고 있다. 부르디외는 그것을 ‘제도의 마술적 효과’로 명명했다.

등단제도라는 것도 근원적으로는 제도의 마술이며, 신춘문예의 정당성이라는 것 역시 마술에 대한 신뢰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어느 급진주의자가 있어 제도와 무관하게 스스로 문인됨을 주장한다면, 계몽된 현실주의자인 나는 기꺼이 머리를 숙일 것이다. 등단제도를 문학적 흑마술로 전환시키고 있는 일부 사이비 문예지들의 준동을 지켜보노라면, 차라리 문인됨을 승인하는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해보는 시각이 오히려 절실히 요청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1) 김춘희, 「한국 근대문단의 형성과 등단제도 연구」, 동국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김종회,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근대적 문학제도의 형성」, ?한국문학평론?, 2002년 봄호(국학자료원, 2002)를 들 수 있다.
2) 백지연, 「관리와 통제의 관문」, ?한겨레?, 2002. 1. 21.
3) 문순태, 「신춘문예, 그 화려한 등용」, ?정신과표현?, 2002년 3․4월, p. 25.
4) 문예진흥원이 발간한 ?문예연감 2002?에 따르면, 2002년 현재 문예지는 175종이 발간되고 있으며, 2001년 한 해동안만 20종의 문예지가 창간되었다.
5) 김정란, 「신춘문예, 다시 생각해보자」, ?말의 귀환?(개마고원, 2002).
6) 이명원, 「문제있는 신춘문예, 등단의 마지막 비상구」, ?민족예술?, 2002. 2.
이명원  1970년 서울 출생.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에 『타는 혀』, 『해독』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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