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3] 신춘문예 제도, 이렇게 생각한다 |
3. 신춘문예 제도, 이렇게 생각한다 아름다운 전통 이 성 부 | 1962년 《현대문학》 추천완료, 1967년 《동아일보》 시 당선 신춘문예 제도는 우리 문학계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굳어졌다. 신문사마다 새해 첫날에 새로운 작가를 탄생시키는 이 제도는, 이 제도를 통해 등단하는 시인·소설가·평론가는 물론, 넓은 독자층에게도 신선한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작가의 배출을 왜 신문사의 연례행사로 치러야 하느냐는 일부 비난도 없지 않았으나, 신문의 공익성·공정성·두꺼운 독자층 때문에 이 제도는 더욱 권위를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문학지의 신인상·추천 제도에 견주어 신춘문예가 갈수록 문학 지망생들에게 큰 관심과 호응을 얻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신춘문예 제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 왔다. 이 제도가 일제의 식민 문화정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 신춘문예 당선 작품들은 심사위원의 성향을 따르는 신춘문예풍 유행작품을 만든다는 점, 2∼3명 심사위원의 성향·취향 때문에 객관적으로 더 좋은 작품들이 탈락할 수 있다는 점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은 문학 전문지의 추천제도나 신인상 제도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났으며, 폐단으로 지적된 바 있다. 문학은 어차피 개인의 체험과 세계인식과 상상력의 소산이다. 이러한 문학을 선별하는 작업 역시 개인적인 취향·성향이 작용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심사의 공정성·객관성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성향이나 작품세계가 다른 3∼5명 정도의 심사위원을 예심과 본심에서 각각 구성할 필요가 있다. 예심에서는 좋은 작품을 탈락시키지 않는 데 주력해야 하고, 본심에서는 최고의 작품 하나를 고르는 데 심사위원들의 충분한 토론과 합의 도출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당선한 신인에게는, 그 신문사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이 따라야 할 것이다. 신춘문예 제도는 우리 문학의 한 역사이자 전통이며, 문학 발전의 한 계기라고 생각한다. 심사위원 선정의 편중성 극복돼야 이 수 익 | 1963년 《서울신문》 시 당선 신춘문예의 가장 큰 미덕은 아무래도 입상작 선정과정의 엄정성, 투명성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신문’이라는, 사회적 공신력을 담보하고 있는 매체가 지녀야 할 품위와 신뢰성, 그리고 외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좋은 신인을 뽑아야 하는 심사위원들의 인격과 책임감 등이 어우러지면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다. 상대적으로 문예지의 신인 선발과정은 훨씬 더 가족적이고 덜 공개적이어서 사적 개입의 틈이 넓다. 그래서 간간이 우리는 문예지의 신인 등용과정에 얽힌 불미스러운 배후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다. 신춘문예가 지닌 또 하나의 마력은 신문사마다 각 장르에 걸쳐 당선자를 한 사람밖에 뽑지 않는, 그 숫자의 희소성에 있다. 시의 경우 해마다 응모자는 수천 명에 이르는데 딱 한 명만 뽑으니 당선자 본인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당선자를 바라보는 주위의 관심과 시선도 각별해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영세자본으로 잡지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신인 추천을 남발하는 전문지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고 보면 신춘문예가 보여주는 그 희소성의 가치는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신춘문예가 반성하고 고뇌해야 할 점도 있다. 첫째, 심사위원 선정의 편중성을 극복해야 한다. 어느 해에 보면 한 심사위원이 몇 개 신문의 심사를 두루 맡은 걸 볼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엔 당선 작품의 다양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제 아무리 폭넓은 관점으로 작품을 본다고 하더라도 심사위원 개개인의 작품에 대한 취향은 다르게 마련이므로, 개성 있는 신인의 폭넓은 발굴을 위해서 이런 현상은 극복되어야 한다. 둘째, 본심 심사위원의 수도 더 늘려야 한다. 본심 심사위원 수가 각 장르에 걸쳐 2명씩인 것은 신춘문예 역사가 수십 년이 됐는데도 한결같이 변하지 않고 있다.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고 작품의 경향도 훨씬 다양해졌는데 심사위원의 수는 왜 항상 2명인가? 장르에 따라서 3명 내지 5명 정도로 그 수를 늘리는 것이 시대 추세에 부응하는 것이 된다. 셋째, 신문사마다 천편일률적인 현행 공모 시스템을 과감히 탈피하여 몇몇 신문은 보다 진보적으로 변형된 신춘문예 제도를 시행했으면 한다. ‘우리 신문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만 모집합니다’라는 공모 문안은 볼 수 없는 것일까? ‘신춘’보다 각사 창립일에 현상공모해야 이 탄 | 1964년 《동아일보》 시 당선 신춘문예는 대개 신문사가 실시하는 정통 있는 행사이다. 당선작(시)은 1월 1일 발표가 된다. 중앙일보가 이를 벗어나 늦여름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양력 1월 1일은 겨울로서 봄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있다. 왜 신춘문예라고 했을까. 양력 새해부터 1년간의 꿈을 세워 놓으라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면 1월 1일 낙방한 응모자에게는 무어라 하고 위로를 해야 할까. 신춘문예는 1920년 무렵, 매일신보가 먼저 시작했다. 그때는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문화행사의 하나로 열린 중요한 행사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1월 1일부터 우리 시를 더 발전시켜 보자는 것이 아닐까. 1927년에 동아일보의 첫 당선자가 나왔는데 해강(「새날의 기원祈願」), 정태연鄭泰淵(「우리는 일꾼이여」), 박아지朴芽枝(「어머니시여」), 김시용金時容(「우리는 아이」) 네 명이었다. 1925년, 1926년에는 한 명도 당선자가 없다가 1927년에 네 명을 뽑은 것이다. 그런데 똑같이 당선작으로 뽑은 것이다. 그때는 해마다 시를 뽑지 않을 때가 있었으며, 당선작, 가작을 뽑을 때도 있었다. 시를 해마다 뽑지 않은 것은 그 해에는 신통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두 명 정도면 모르겠으나 네 명씩이나 당선자를 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많은 것 같다. 또 당선작, 가작을 뽑을 것 같으면 가작으로 뽑힌 응모자는 당선될 때까지 계속 투고해야 할 판이다. 이런 경우 당선작 하나만 내든지 아니면 둘 다 당선작으로 정해야 좋을 것 같다. 다시 신춘문예의 발표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신춘문예를 없애야 한다. 신춘이란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① 신춘문예를 없애고 각 신문사 창립일에 발표(작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문사에선 창립일을 맞이하여 소설을 모집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없애고 전부 창립일로 정하는 것이다. ② 때에 따라서 두 명을 뽑을 수 있다고 본다. 이때 한 편을 가작으로 하지 말고 당선작으로 뽑아 주든지, 숫제 가작을 없애버리든지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③ 당선작을 뽑는 심사위원은 세 명으로 했으면 싶다.(나이는 대개 70살 초까지, 60대, 50대가 좋지 않을까.) 오늘날 신인이 될 수 있는 길은 많아졌다. 전과 같지 않다. 전에는 전국 열 명이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신문사에서 모집하면 응모자는 몇 천이 넘는다. 응모자 수가 많다. 수효가 많으므로 한 번 해 볼만하다. 많은 응모자 가운데 당선이 되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독자가 많은 신문일수록 기쁨은 비례할 것이다.(출판사에서 당선 시인만 모아서 실어 주거나 책을 출판해 주기도 한다.) 신문사에서 모집할 때 당선자는 원고료(상금)를 받으므로 친구 등에게 한턱 쓸 수 있다. 신문사라는 속성이 있어서 자연 그 쪽으로 손이 간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럴까? 나이 많은 응모자, 여성들의 작품이 뽑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도 ‘속성’을 알아서 뽑혔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하여간 실력이 있는 자가 뽑히는 것이다. 신인들에게 차려주는 잔치, 뜻있고 고맙다 박 의 상 | 1964년 《서울신문》 시 당선 우리 신문사들의 신춘문예 제도는 아주 뜻있고 고마운 제도이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일본에서 시작했다가 지금은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모양이지만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좋겠다. 다른 신인 추천제도도 그렇지만 이 제도에도 폐弊와 해害가 있다. 먼저 ‘해’라 할 것을 생각해보자. 50년대 언젠가부터 공공적 관심이 강한 응모시들이 한 20년 당선을 이었다. 우리가 흔히 행사시行事詩라 말하는 것들이었다. 이 경향이 심사위원들의 뜻이었는지 신문사들의 뜻이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폐’라 할 것이 있다. 사람이나 그 정신은 먼저 알지 못한 채 응모시만 읽고 당선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 단점을 다른 추천제도인 문학잡지가 보완했으면 좋겠다. 패거리만 낳는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공功’과 ‘득得’이 훨씬 중요하다. 수십만 수백만 독자를 불러 신인들의 잔치를 열어주는 것, 이것이 뜻있고 고마운 공功이요 득得이다. 10월이면 신문들은 다투어 공고를 낸다. 12월초까지 5번 이상 커다랗게 나팔을 불어주는 것 아닌가. 독자들이―문학이 중요하구나, 신인이 중요하구나, 느끼게 된다. 그리고 1월 1일은 어떤가. 떠들썩하게 지면을 만들고 금테은테를 둘러 작품과 당선자를 알린다. 수많은 독자들이 다시 생각해준다.―문학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신인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사실 그렇지 않은가. 흑백사진의 추억 오 탁 번 | 1967년 《중앙일보》 시 당선 신춘문예의 역사가 하도 장구하기 때문에 이에 얽힌 달고 쓴 추억이나 이야기가 많기도 하려니와, 이제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신인을 배출하는 엄숙하고 공정한 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필요악의 하나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이 아주 없지 않다. 각 신문사가 경쟁이라도 하듯 신춘문예를 실시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고라도 한번 배출한 신인을 도저히 책임질 수 없는 신문의 속성 때문에 등단이라는 정월 초의 화려함은 곧 그 신인의 방황과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신춘문예로 등단한 수많은 신인들, 특히 보수적 전통에 대한 도전력과 새로운 창작기법을 모색하려는 천재성을 지닌 신춘문예 당선 신인들이 곧바로 문단의 미아가 돼버린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문예지의 추천이나 신인상을 통하여 등단한 문인들이 문단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는 것도 신춘문예라는 일회성 행사의 단역으로 자신의 운명을 헛된 명예와 상금으로 맞바꾼 신춘문예 희생자들의 무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나같이 신춘문예 낙선자들인 이들 문예지 출신의 등단 신인들은 이미 추천이라는 제도를 통과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익혀야 하는 처세술과도 같은 현실적인 지혜를 터득하지 않으려고 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고 보면, 그들은 화려한 조명을 못 받기는 했을망정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신춘문예 당선자들보다는 훨씬 경쟁력이 있었을 것이다. 신춘문예 ― 그러면 이것은 이제 필요악도 되지 못하는 헛된 것으로 끝나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각 신문사가 지금까지 경주해온 나름대로의 문학의 제도적 장치나 지향에 관한 긍정적인 헌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춘문예의 모집 장르를 지금처럼 다양하게 하지 말고 신문사가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장르만을 골라 제한적으로 신인을 배출하면 어떨까. 어떤 신문사는 시, 다른 데는 소설, 이런 식으로 말이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해! 요즘 신문사들이 서로 죽자살자 경쟁하는 일이 본업인데 말되는 소릴 해야지, 쯧쯧. 내가 이렇게 제안하자마자 요렇게 혀차는 소리가 들려오누나. 지금 생각하면 내가 동화, 시, 소설의 세 장르에 걸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는 사실은 영광이 아니라 멍에였다. 또 나에 대하여 우의적 교류보다는 애시당초 밑도 끝도 없는 미움을 내세우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 구겨진 흑백사진은 그 자체로야 아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이지만 젊은 날에는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했던 환호와 영광이 평생토록 미움의 단서가 되고 있는 바에야 차라리 그 흑백사진의 추억을 망각하는 게 상책이라는 자조도 아주 없지 않다. 진짜 ‘참신한 신인 발굴’ 임 영 조 | 1971년 《중앙일보》 시 당선 1925년 일제치하에서 동아일보가 최초로 조선 문예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한 이래 여타 신문사가 뒤이어 연례행사로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겨우 칠십 년 남짓한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1백여 년을 헤아리는 우리의 근대문학사에 칠십여 년 역사는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우리의 신춘문예 공모제는 일천한 한국 문학사에 뿌리를 내려 해마다 역량 있고 우수한 신인들을 발굴하여 우리 문학의 두께를 더해왔기 때문이다. 근자에 들어 자고 새면 우후죽순처럼 문학지가 창간되고 따라서 신인들도 그 비례로 양산되고 있지만, 역시 신년 벽두에 신문지상을 통해 화려하게 등단하는 행운은 문학지망생들에게 떨쳐버릴 수 없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과거의 일부 문학지가 운용하던 추천제와 달리 신춘문예 등단제도는 전국 문학지망생들의 작품을 일거에 공모하고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이 그 우열을 가려 단 한 명의 신인에게 고액의 상금까지 얹어 영예를 안겨준다. 따라서 수혜자의 자긍심 또한 큰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수반되는 고질적인 폐단도 없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신춘문예용’ 작품 양산과 선자들의 아류가 형성돼온 점이다. 문학지망자들이 자신만의 정서나 개성을 접어둔 채 앞서 등단한 선배들의 작품 경향을 매년 답습해온 관행이 그것이다.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만 짚자면 심사진의 구성에 있다. 다시 말해서 신춘문예 심사를 몇몇 선자가 해마다 도맡아온 결과가 낳은 부작용이 아닐까? 그러니 후진들은 자신만의 독창적 문학세계나 창법을 개발하기보다 그들 구미에 맞는 요령만 먼저 터득하기에 급급하다. 그 결과 등단과 동시에 명멸하거나 자신의 개성적인 성채를 구축하는 데 오랜 시간과 노고를 재투자해야 한다. 선진국 어디에도 없다는 신춘문예 제도는 분명 척박한 우리 문학 풍토에 활력소가 되었고, 그 성과는 한국문학사에 크게 기여해온 게 사실이며 또 지속돼야 한다. 허나 아무리 좋은 제도도 그동안 드러난 폐단을 계속 간과한다면 매년 유사한 신인은 양산될지언정 진짜 ‘참신한 신인발굴’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이왕의 좋은 제도로 소기의 목적을 얻으려면 주최측의 보다 세심한 운용과 개선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꿈의 공장, 신춘문예 안 도 현 | 1984년 《동아일보》 시 당선 고등학교 1학년 때, 문예반 시화전을 끝내고 선배들과 이른바 평가회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나는 어깨를 한껏 낮추고 졸업한 선배들이 나누는 말을 가만히 엿듣고 있었다. “나도 내년에는 신춘 한번 해야지.” 어떤 선배 하나가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그 말의 뜻을 나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신춘을 한다? 신춘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걸 어떻게 한다는 건가? 그걸 하면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건가? 풋내기 문학소년한테 그 말은 안개로 둘러싸인 무슨 신비한 암호 같았다. 습작기, 신춘문예는 그렇게 나에게 왔다. 신춘문예가 문인 등단 제도로서의 기능을 호되게 검증받아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던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신춘문예는 창백한 골방의 펜대 끝에서 나오는 문학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집단성, 현장성, 계급성 등의 개념이 문학 속으로 접목되면서 신춘문예는 한때 초췌하고 남루한 인상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이 제도의 태생적 한계가 지적되기도 하였으며, 작품의 유형화라는 측면에서의 비판이 제기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춘문예의 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문학을 꿈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춘문예는 여전히 하나의 꿈의 공장이기 때문이다. 그 공장이 만약에 없었다면 누가 문학을 꿈의 중심에 턱하니 얹어 놓겠는가. 등단 전, 내 습작품은 대부분 신춘문예 마감일을 앞두고 마무리된 것들이 많다. 그때 참으로 많은 시를 끙끙대며 쓴 것이다. 당시에는 해마다 당선과 상금이 일차 목표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혹독한 수련과 연마라는 창작의 기본을 신춘문예로 인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년 첫날의 신문이 일 년 중 가장 신선한 것도 꿈의 공장에서 나온 두근거리는 생산물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신춘문예, 내 마음의 고향 이 승 하 | 1984년 《중앙일보》 시 당선 나는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운이 더욱 좋았더라면 문학평론과 희곡과 시조 부문에서도 당선되었겠지만 이 세 장르는 최종심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많은 문학인이 말한다. 아직도 신춘문예 사고社告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고. 그가 신춘문예로 등단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상관없다. 문학청년 치고 신춘문예에 작품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지금은 문예지가 많이 나와 등용문이 엄청나게 넓어졌지만 내가 등단을 꿈꾸던 80년대 전반기에는 문예지의 수가 적어 신춘문예의 매력이 지금 같지 않았다. 주변의 문학도 가운데 몇 년이 걸려도 신춘문예로만 등단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이가 무척 많았다. 그만큼 매력 있는 등단제도였기 때문이리라. 신춘문예만의 장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25년 동아일보사에서부터 시작된 긴 역사, 신년벽두 일간지에 당선작과 당선소감과 사진이 함께 실리는 영광, 적지 않은 상금, 비교적 공정한 심사, 여러 문예지의 당선작 특집, 신춘문예 당선작품집의 발간……. 하지만 워낙 오래 이 제도가 유지되다 보니 문제점이 하나둘 불거져 신춘문예 폐지론까지 나오고 있다. 글쎄, 언론사가 우리 문학을 위해 베푸는 잔치를 앞으로는 열지 말아달라고 요구할 필요가 있을까. 문제점이 있다면 보완하면 되지 않겠는가.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신춘문예 단골 심사위원이 있다. → 심사위원을 해마다 바꾼다. 예심위원도 마찬가지이다. ·심사하는 기간이 너무 짧다. → 11월 말에 마감하여 예심, 준결심, 결심 3단계를 거친다. ·‘신춘’이란 명칭에 맞지 않게 작품이 구닥다리다. → 심사위원의 연령을 40∼50대로 낮춘다. ·당선작의 수준이 의심스럽다. → 시는 10편 이상, 소설은 2편 이상 작품을 심사하여 확실히 검증한다. ·문단의 미아가 되고 만다. → 신문사가 문예지의 신춘문예 특집에 신경을 써 발표지면 확보에 도움을 준다. 신문지면에 작은 칼럼도 쓰게 한다. ·스승이 제자를 뽑는 경우가 많다. → 그런 사실이 드러날 경우 심사위원에서 배제한다. ·두 명이 심사하면 연장자의 의견으로 결정된다. → 심사평을 심사위원이 따로따로 쓴다. 신춘문예가 앞으로도 좋은 등단제도로서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철저하게 공정해야 한다. 공정성이 의심되는 결과가 나왔을 때 그 심사위원은 우리 문학의 앞날에 먹칠을 한 사람으로 지탄받아야 한다. 객관적인 최우수작이 아니라 자신의 아류나 제자의 작품을 뽑는 심사위원을 참 많이 봤다. 신춘문예 당선작만큼은 좀 참신했으면 좋겠다. 다시 태어나도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싶다. 유실수를 잘 가꾸자 장 석 남 | 1987년 《경향신문》 시 당선 어느 매체를 통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도 몇 번인가 신춘문예에 관한 논의를 본 기억이 있다. 폐해가 있느니, 폐지하는 게 좋다느니 하는 류의 논의를 보면서 참 논의거리가 없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었다. 거기 그냥 그대로 서서 때가 되면 열매를 떨어뜨려 주기도 하는 어느 산모퉁이의 주인 없는 유실수를 두고 시비를 거는 꼴이랄까.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하등의 신경도 쓸 필요가 없는 그 행사를(문단 판세에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살리라 마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건 그저 신문사 사장들이 알아서 할 일인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20대 초반 시절 문단에 데뷔하는 방법에는 신춘문예나 문예중앙 신인상 정도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현대문학이나 문학사상도 추천제가 있었겠지만 당시 내 주변에는 그 매체를 통해 데뷔한 사람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었고 창비나 문지 같은 잡지는 나오지도 않았다. 무크지라는 것이 있었지만 색깔(?)별로 다양했으므로 거기에 맞추기도 거북할뿐더러 투고해 보아도 도대체 언제 마감을 해서 딱! 발표를 한다는 기약이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다들 오면 오고 말면 마는 ‘수시 마감’ 류들이랄까? 도대체 그런 데는 긴장이 없으니까 재미도 없다. 어떤 때는 자신들의 맘에 맞는 것만 무더기로, 또 어느 때는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 기타 여러 시잡지들이 있었지만…… 그저 죽으나 사나 신춘문예만 해야 하는 줄 알고 찬바람이 불면 이미 그 즈음부터 커피를 여러 잔 마시면 일어나는 현상, 약간은 맥없이 들뜨는 카페인 과다 상태와 같은 기분이 되어서 돌아다니고 밤새고 그랬다. 그 전의 당선시들, 바다에 가서 뭘 어떠니, 원시림이 어쩌니, 석기 시대가 어쩌니, 그림이 엎질러졌느니, 맨발이 어쩌니, 빈 대합실이 어쩌니, 하염없이 눈이 오느니, 플랑다스가 어쩌니, 모딜리아니가 어쩌니, 출항이 어쩌니(점점 가슴이 뜨거워진다!) 하는 그런 유치찬란한 세계를 거창하게 흉내내보기도 하는 기간이 또한 그 기간이다. 그 두어 달은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선후배 문청들에게는 각자 내면적으로 카니발의 상태가 되는 셈이다. 어떤 금기도, 억압도 물리치고 나름으로 맘껏, 뭔지 모를 방향으로 돌진해보는. 그래서 멀쩡히 다니던(그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직업이었던가!) 출판사도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지는 일이 흔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주변에 한둘이(한둘씩이나!) 간택되고 나머지 ‘너나 나들’은 모두 풀이 죽어버리고 마는 것만 보아도 그것은 그 인종들만이 가질 수 있는 현기증 나는 카니발이 맞다. 그러한 카니발은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모두 그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말이다. 산모퉁이의 그 찬란한 유실수를 자기 집에서 멀다고 하여, 자기에겐 혜택이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 하여, 또는 자신의 유실수보다 더 크다고 하여, 베어 버려야 하느니, 폐해가 심각하다느니 해서야 속좁은 일이 아닌가. 그 산주인이 정말 나타나서 이꼴저꼴 보기 싫다고 베어버리면 속이 시원하겠는가. 그럴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뭘 그럴 필요가. 남들이 벌여주는 축제를 제 발로 차버릴 필요가 뭔가. 자신들이 갹출해서 마련한 것도 아닌데. 한데 아직 신춘문예에 그토록 흥미를 갖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글쓰기의 수련을 위한 통과의례 박 형 준 | 1991년 《한국일보》 시 당선 신춘문예에 대해 특별히 쓸 것은 없다. 나도 여느 문학청년들이 그렇듯 신춘문예에 대한 열병을 앓으며 자랐고 통과했기 때문이다. 모든 제도는 그 제도로서 허점이 있을 수 있고 장점이 있을 수 있다. 하물며 문학 제도임에야. 솔직히 청탁을 받고 거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신춘문예에 뭘 더 이야기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신춘문예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라면 나는 좋은 제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자발적 의지로 신춘문예에 도전해서 시인이라는 명칭을 얻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현재까지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또 굳이 서구를 들먹여가면서 이런 문학 제도는 지구 어디에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도 않다. 앞으로도 신춘문예를 통해서 좋은 시인과 작가들이 탄생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한 번쯤 시를 쓰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그것은 인생의 실수도 욕망의 산물도 아니다. 어쩌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영광은 짧고 시련은 길다. 그 힘겨운 수련을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다만 좋은 재목들이 심사위원들의 밝은 눈을 통해 발굴되기를 바란다. 말을 바꾸면 설령 지금 되지 않더라도 많은 문학청년들이 좌절하지 말기를 바란다. 굳이 신춘문예가 아니더라도 좋은 문학잡지들은 많고, 그러한 문학잡지들을 통해서 좋은 시인과 작가들은 끊임없이 태어난다. 나는 무엇보다도 시와 소설을 쓰려는 의욕과 좌절하지 않는 정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신춘문예 등을 통한 등단은 다음이다. 그것도 자신이 선택해서 등단을 하는 것이니 제도를 너무 원망할 필요도 없다. 문학은 평등 정신이 구현되는 장이 아니다. 언어의 운용은 그 사람의 세계이며 그것으로 독보적이다. 신춘문예 때문에 자신의 문학 인생이 굴절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등단 제도는 통과의례에 불과하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상상력이 극대치로 발휘되는가 하는 글쓰기의 고통이다. 그 고통에 비한다면 신춘문예면 어떻고 잡지 등단이면 어떤가. 4.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에게 주고 싶은 말 -내일의 시인이여, 이런 시를 써라 어느 날의 짧은 시 이야기 신 경 림 | 1956년 《문학예술》지 시 추천 어느 날 인사동에서 시를 공부한다는 젊은이를 만나 다음과 같은 짧은 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젊은이 : 저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를 공부하는 문학도이기도 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가능한 한 아이들한테 많은 시를 읽게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시가 너무 많은 겁니다. 현대시는 당연히 이렇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가, 이 점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십시오. 나 : 현대시가 어려워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령 1차대전 후 시가 너무 어려워져 독자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하자 이를 걱정한 오든(Wystan Hugh Auden, 1907-1973) 같은 시인은 《옥스퍼드 북 오브 라이트 버즈(Oxford Book of Light Verse)》라는 앤솔로지를 편집하면서 가볍고 대중적인 시 운동을 주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시는 소리와 가까운 것으로 여겨져 왔지요.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시인들은 시를 가지고 노래만 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시를 통해서 삶의 가치와 진실을 추구하고 세상을 새롭게 발견해 갑니다. 나아가서 소재를 밖에서 찾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찾는 경향도 갈수록 심해집니다. 말하자면 시를 통해서 자기탐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러니 시는 자연 어려워지고 독자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 길은, 처음에는 산문, 다음에는 영상매체로부터 위협을 받으면서 시가 택할 수밖에 없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시의 난해성에는 일정부분 부득이한 면이 있습니다. 문제는 전혀 필연성이 없는 엉터리 난해시입니다. 이런 엉터리 난해시가 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시인이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정확하게 말할 능력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경우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니까 자연 시가 어려워집니다. 두번째는 말장난에 치우친 경우입니다. 말을 돌리고 비틀고 하다 보니까 시가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세번째는 시를 억지로 만드는 경우입니다. 내용이 없으니까 시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난해시, 이런 시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애정을 가져야겠지요. 하지만 엉터리 난해시는 독자로 하여금 시를 외면하게 만드는 내적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이 : 요즘 독자들은 더욱 시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원인이 다 시인들한테만 있는 걸까요? 나 : 물론 그렇지는 않지요. 산업혁명 이후 매체의 확대는 계속 시를 압박해 왔습니다. 인쇄기술의 발달은 시를 대신하여 산문을 문학의 왕자 자리에 앉혀 놓았으며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영상매체가 대중의 총아가 되지 않았습니까. 21세기는 인터넷의 시대라고 할 만큼 전세계적으로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종이문화 전체가 사이버예술 앞에 위축당하는 현상이 벌어졌고, 그 피해자의 선두에 시가 서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들이 이제 시는 쫄딱 망했다고 청승을 떨거나 비분강개하는 꼴은 정말 보기 역겹습니다. 한때 시가 산문이 할 수 없는 것을 찾았듯이, 사이버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 시만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들이 마음을 닫고 속으로 움츠릴 것이 아니라 활짝 열어제치는 것입니다. 시가 너무 닫혀 있어 독자와의 대화 또는 교섭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지금 시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젊은이 : 저같이 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나 : 물론 이런 시만이 좋다, 시란 이렇게 써야만 한다고 좋은 시의 기준을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터무니없이 용감한 사람이거나 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이 점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남들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시를 좀 써달라는 것입니다.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시가 너무 많아요. 다음으로는 시를 억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나도 시는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란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시를 만드는 경향이 너무 심해요. 시가 작위적이라는 뜻이지요. 리듬이란 게 뭡니까? 자연스러움, 바로 그것이 리듬이 아니겠어요? 요즈음의 시에 리듬이 없다는 말은 시가 너무 작위적이어서 나오는 말이지요. 또 시를 너무 마구들 써대요. 많이 쓰는 것이야 누가 뭐라겠습니까! 하지만 한 편으로 쓸 수 있는 시를 다섯 편, 열 편으로 쓰는 경향들이 있어요. 이래서 시의 인플레가 생기고 시는 더욱 독자로부터 외면당하지요. 이런 경우도 보았어요. 첫시집이 아주 좋아서 제가 극찬을 한 신예가 있었어요. 1년이 안돼 두번째 시집이 나왔어요. 한데 그 수준이 영 엉망이에요. 알고 보니 습작시절에 썼던 시를 묶어서 냈다는 거예요. 그 신예는 두번째 시집으로 인해 첫번째 시집의 명성도 스스로 까먹었어요. 자기 작품이라도 과감히 버리고 취하는 용기가 없다면 좋은 시를 쓰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위 유행에서 과감히 벗어나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남들과 달라야 그게 좋은 시지 남들이 다 쓰는 그런 류의 시를 써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젊은이 : 고맙습니다. 미래의 시인들에게 ―― 영합과 우월로부터 자유롭기 정 진 규 |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사실 이런 글은 재미가 덜하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투의 선험자의 교조적인 발성은 아무래도 경직성을 동반하며 상투적이기 쉽기 때문에 내 구미에 맞지 않는다. 차라리 시나 한 편 함께 읽자. 오동잎에 바람 이니 서글퍼져 장사壯士의 마음 괴로운데, 희미한 등불에 풀벌레 소리 차가워라. 그 뉘일까? 나의 한 편 시고를 읽으며, 화충花蟲이 좀먹지 않게 할 사람은. 서글픈 생각에 이 밤 가슴 메이고, 차가운 빗속을 향혼香魂이 내게 조상오네. 가을 무덤 속에 귀신되어 포조鮑照의 시詩를 노래하리니, 한스러운 피는 천년을 두고 땅속에서 푸르리라. ―― 이하李賀(中唐 790∼816) * 和蟲 : 나무좀과에 속한 좀벌레 * 鮑照 : (?~466) 중국 육조 송나라 때의 시인. 특히 악부에 능했다. 여기서 포조의 시란 死者의 감개를 나타낸 시를 가리킴. 불운했던 시인. 27세라는 짧은 생애로 요절한 귀기鬼氣어렸던 신현神絃의 시인. 이하李賀를 읽을 때마다 다음 구절이 떠오른다. “세상 사람들이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를 읽을 줄 모르며,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을 뜯을 줄 모르니,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좇아 다니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느냐.” (명말明末, 홍자성洪自誠 『채근담菜根譚』) 어찌 이 구절뿐이겠는가. 다음 구절이 더욱 가슴을 친다. “소위 시인이란 것은 음시吟詩깨나 한다고 시인이 아니요, 가슴 속이 탁 터지고 온아한 품격을 가진 이면 일자무식이라도 참 시인일 것이요 반대로 성미가 빽빽하고 속취俗趣가 분분한 녀석이라면 비록 종일 교문작자(咬文嚼字 어려운 글자를 즐겨 써서 학문을 자랑하거나 재주를 뽐냄을 형용한 말)를 하고 연편누독(連篇累牘 문장이 지나치게 장황함)하는 놈일지라도 시인은 될 수 없다. 시를 배우기 전에 시보다 앞서는 정신이 필요하다.”(『수원시화隨園詩話』) 인용이 장황해졌는가. 내가 〈교문작자〉, 〈연편누독〉이 되어 버렸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점들이 이하李賀를 외롭게 소외시켰기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우리 현대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보이는 것만 계속 보고 들리는 것만 계속 들으면서 지루한 줄 모르는 게 오늘날 우리 시단의 한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지루한 줄 모르는 게 아니다. 그저 편하자는 속셈이요, 저희들끼리만 울타리를 치자는 역겨운 작당의 누추한 몰골이 아니던가. 미래의 시인들이여. 그대들도 저러한 현실에 시달리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의 것을 내보이면 읽히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자서有字書’만 내 보이고 ‘유현금有絃琴’만 내보이는 영합주의迎合主義의 비겁을 저지르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의 저 소중한 ‘무자서無字書’와 ‘무현금無絃琴’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당신들의 새로운 ‘서書’와 ‘금琴’을 울면서 포기하고 있지 않은지. 미래의 시인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나는 오직 이것뿐이다. 당신들의 내면엔 분명 ‘신현神絃’이 있고 신운神韻’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라. 이하李賀의 표현대로 그대들의 저러한 시고를 읽어 화충花蟲(좀벌레)이 좀먹지 않게 할 사람은 반드시 어딘가에 있음을 믿는 외로운 자존이 시인됨의 시정신임을 잃지 말자. 또 하나는 보다 본격적인 시정신의 문제이겠는데, 대상을 수용하는 이른바 ‘화자 우월주의’ 상위 시각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자신만의 말을 하고 태어나는 대상의 말을 듣지 않는 일방적인 화법을 뜻한다. 이러한 화법은 해마다 신인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직접 보고 느껴온 것이기도 하고, 우리 기성 시들에도 미만해 있는 한 고질일 수도 있다. 이 또한 앞서 말한 ‘유자서有字書’나 ‘유현금有絃琴’의 한 형국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관념의 감옥이다. 이렇게 되면 시가 설명적인 해석이 될 수 밖에 없고, 유형화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의 작동이란 그 순간부터가 대상과의 합일을 뜻한다. 상호 교감交感의 구체적 활동을 뜻한다. 대상들이 하는 말을 듣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듣는 귀가 열렸을 때 시를 쓰는 몸에는 율律의 무늬가 일기 시작한다. 그 율律의 무늬가 바로 시詩가 아니겠는가. 예를 들자면 앞서 인용한 이하李賀의 시 두번째 구절 “희미한 등불에 풀벌레 소리 차가워라”도 그렇다. 번역의 문제이기도 하겠으나, 원문은 이렇다. “쇠등낙위 제한소衰燈絡緯 啼寒素”, ‘쇠등衰燈’은 희미한 등불, ‘낙위絡緯’는 가을 풀벌레, ‘제한소啼寒素’가 문제다. ‘제啼’는 운다. ‘한소寒素’는 차가운 흰 깁. ‘한소로 운다’라고 직핍해야, 아니면 ‘차가운 흰 깁으로 운다’라고 해야 그 울음의 이미지, 촉감이 살아나고 색채감각이 살아난다. 그게 설명이 아닌 ‘율律의 무늬’이며 대상의 ‘무자서無字書’, 그 화답이다. ‘무현금無絃琴’의 소리이다. 이것을 보고 듣는 체감體感이 새로운 시를 태어나게 한다. 화자 우월주의 상위 시각은 나아가 시를 평면화하고 왜소화시킨다. 여기까지의 나의 말은 미래의 시인들에게만 국한시킨 말이 아니다. 이는 우리 시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극복을 위해 좀더 세부적으로 논의해야 할 문제이며 나 개인의 시론이기도 하다. 좀 어조나 문체가 옛스러웠는가. 진지한 성찰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한 획을 긋는 시를 쓰자 이 근 배 | 1962년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에 시·시조 당선 이 땅의 모국어에 새옷을 입히는 아침이 있다. 신문학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던 20세기 초엽, ‘신춘문예’ 제도가 신문에 의해 생겨나면서 우리의 시(문학)는 한 해에 한 번씩 키높이를 이뤄왔었고 오늘까지 꼬박 80년 동안 모국어를 활짝 꽃피워 왔다. 신춘문예가 우리 문학사의 한가운데서 맥맥히 흘러왔고 또 흘러갈 것임을 나는 깊이 믿고 있다. 가령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서정주(시), 김동리(소설), 이호우(시조) 등이 당선된 예만 보더라도 신춘문예라는 상대평가의 자리에서 뽑힌 작품 혹은 작가가 오늘의 문학에 얼만큼 영향을 주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새해 이른 아침 사람들은 조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신년호를 펼치면 신춘문예 당선시에 먼저 눈이 간다. 거기에 모국어가 이 땅의 시가 더 높은 발돋움을 하고 새로운 탄생의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이른바 ‘에포크 메이킹’은 신춘문예가 주도해 왔고 시의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은 오래 남아서 읽고 또 읽힌다. 들끓는 가슴으로 붓을 갈며 신춘문예를 향하여 돌진하는 문학신인들은 자신이 갈고 닦은 기록이 지금까지 앞서간 선배나 함께 겨루는 동료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를 시험받게 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려면 세계기록을 깨뜨려야 하듯이 당선을 움켜쥐려면 기성의 벽을 넘어야 한다. 어느 신문에는 어떤 경향의 심사위원이 작품을 고른다거나 최근 몇 년 동안 어떤 유형의 작품이 당선되었다든가 하는 정보는 참고는 될지 몰라도 기웃거리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눈치놀음은 자신을 깎아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선’이라는 목표를 두고 전략 따위는 따로 없는 것이다. 오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창적 세계를 열어가는 길, 앉아서도 쓰고 서서도 쓰고 눈감고도 쓰고 쓰러져서도 쓰는 일, 그것만이 최선의 전략이요 당선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그러나 쓰기 위해서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신춘문예’의 시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응모작품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시 한 편을 고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누군가가 즐겨 쓰는 시의 아류라든가 한창 유행하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지금까지 뻗어온 시문학사의 줄기에 한 치 높이의 새순을 내밀겠다는 의욕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 첫째, 글감을 고르는 일부터 엄정해야 한다. 목수는 나무를 잘 골라야하고 조각가는 좋은 대리석을 구하러 나설 것이다. 좋은 목재는 한두 해 자란 것이 아닐 테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 깊은 산중에서 자란 희귀한 나무를 찾았을 때 목수는 신명이 나듯이 좋은 글감을 얻고 나면 인스피레이션도 저절로 오지 않겠는가. 둘째, 시의 생명은 주제에 있다. 전쟁이나 혁명, 그런 인류사적인 것만이 주제가 아니다. 작은 풀씨, 곤충의 날개짓 하나에도 가슴에 와 박힐 따끔한 주제를 내세울 수 있다. 큰 목소리를 내거나 많은 것을 주워담으려기보다는 작은 것이라도 선명하게 떠올려지는 시인의 생각이 살아 있으면 큰 시가 되는 것이다. 셋째, 살아 움직이는 말을 쓰자. 아무리 좋은 글감, 빛나는 주제라도 문장이 서지 않으면 시가 되지 못한다. 특히 우리의 문학은 문장의 문학이다.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 희곡, 평론 등도 레토릭에 의해서 글이 죽고 살고 한다. 한 마디로 살아서 펄펄 뛰는 말을 쓰면 시는 살아서 펄펄 뛰고, 죽어서 썩는 말을 쓰면 시는 죽어서 썩는다. 이미 닳고 닳도록 쓴말, 하도 오래 눈에 익고 귀에 박혀서 이끼 낀 바위가 된 말은 모두 내다버려야 한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생명을 불어넣을 때 시는 세상을 깨우는 힘을 갖게 된다. 넷째, 새 이름을 만들자. 시쓰기는 이름 짓기이다. 사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새로 짓는 일이다. 하물며 시의 이름(제목) 짓기를 소홀히해서는 안 된다. 평이한 제목으로도 좋은 시가 나올 수 있지만 아무도 써보지 않은 새 이름을 가지고 나서는 것이 더욱 신선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좋은 시로 가는 길은 무수히 열려 있다. 누가 가르쳐 주는 길이 아니라 내가 없는 길을 뚫고 가는 것이 창작이라면 쓰고 또 쓰는 ‘나의 길’을 열어갈 일이다. 중얼거리며 헤엄치기 김 광 규 | 1975년 《문학과지성》 시 등단 새가 ‘지저귄다’, ‘운다’, ‘노래한다’는 말을 흔히 쓴다. 참새가 짹짹거리고, 까치가 깍깍 짖는 경우를 빼놓고는, 비둘기, 종달새, 까마귀, 부엉이, 뻐꾸기, 소쩍새… 들이 ‘운다’고 말한다. ‘새가 노래한다’는 표현은 외래어의 번역에서 비롯된 것 같다. 짐승의 경우, 돼지가 꿀꿀거리거나 쥐가 찍찍거리거나 맹수들이 울부짖거나 개가 짖는 경우를 빼놓으면, 우리말에서는 거의 모두가 ‘운다’. 너무나 눈물 흘릴 일이 많았던 우리의 민족정서에서 슬픔이 일상화된 언어관습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새나 짐승과 달리 물고기는 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로 인식된다. 바닷속에서 고래들이 내는 소리를 옛날 사람들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물고기는 배가 고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그저 침묵하는 존재로 되어 있다. 지구에서 함께 사는 동물들과 인간이 공유하는 행위로 우리는 ‘울다’, ‘울부짖다’, ‘노래하다’, ‘침묵하다’ 등의 동사를 들 수 있는 셈이다. 동사 ‘말하다’는 인간이 독점하고 있다. 말하기, 즉 언술행위의 여러 형태는 ‘글을 쓰다’와 함께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다. 그 가운데 ‘중얼거리다’도 인간의 독특한 언술방식이다. 특정한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사회적 이익과는 가장 동떨어진 말하기라 할 수도 있다. 누가 중얼거리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예 무시당하거나, “안 들려! 똑똑히 말해!”라고 힐난받는다. 그래도 중얼거림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주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누가 저더러 들으랬나” 하는 태도다. 이러한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많지는 않아도 이렇게 중얼거리며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시인’이라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측할 수 없는 한 평생을 살아가려면, 하루하루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인생을 고통의 바다, 즉 고해苦海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빠져죽지 않고 살아 있으려면, 계속해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헤엄쳐야 한다. 물살이 급한 곳에서는 구명대를 달라고 고함을 치거나, 부유물을 붙잡고 매달려야 할 때도 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이 몸부림을 생업生業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것만 해도 업적이라고 할 수 있고,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그런데 시인이라는 소수의 인종은 이 격랑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무엇인가 남들이 못 알아들을 소리를 중얼거리고, 그것을 종이에 써서 읽어보라고 물에 띄워 보낸다. 생업에 바쁜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아예 알아듣지 못한 채 묵살하거나, 힐끗 쳐다보면서 “뭐라구? 헛소리하지 마!” 하고 윽박지르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시인은 절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종이쪽지를 퍼뜨린다. 몇번이나 익사할 고비를 넘기고 기진맥진하여 고해를 떠돌면서, 이 이상한 짓을 계속하는 것이다. 어쩌다 재수가 좋으면 낯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듣기도 한다. “이봐, 자네의 종이쪽지를 받아보았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더군. 그런 짓 그만두고, 빠져죽지 않을 궁리나 하게.” 반가워할 사이도 없이 그 사람은 파도에 휩쓸려 멀어진다. 그래도 시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멀지 않아 자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입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고해의 짠물을 뱉어내느라고 숨을 헐떡거리며, 시인은 좀더 멋지게 중얼거리는 연습을 하고, 종이쪽지에 좀더 그럴듯한 사연을 적어보려고 몸부림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생업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 고행이라도 하듯 이러한 짓을 계속하는 것을 수업修業이라고 지칭해도 될 것이다. 물귀신 또는 물신物神이 상어떼처럼 몰려다니는 고해에서 그냥 살아남기도 힘든데, 생업을 제쳐놓고 수업에 몰두할 수 있는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없고, 힐난을 받거나 놀림거리가 되거나, 심지어는 정신이 이상하다는 의혹을 마다 않고 이러한 일을 지속할 수 있는가. 평생 계속해야 할 이 수업에 입문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거나 찬탄하리라 기대하면 그것은 오해다. 음유시인이 리라를 연주하면서 천하영웅과 절세미인을 노래하면 수많은 청중이 귀기울이고 환호하던 때는 중세에 끝났고, 가난한 민중의 사랑을 받던 파블로 네루다도 지난 세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시인이 되어 문학수업을 할 결의가 확고하다면, 당신은 신춘문예를 통과하지 않아도 이미 시인이다. 문화저널21 & 계간 시인세계 제공 munhak@mhj21.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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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 신춘문예 우리 문학사에 어떻게 기여했나 (0) | 2010.01.05 |
[기획1] 신춘문예 당선시인 80년사 (0) | 2010.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