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대장경의 비밀 - 대한민국 르네상스 ②
#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으로부터 어림잡아 1000년 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꽃핀다. 마찬가지로 1011년 고려대장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후 1000년이 돼가는 오늘날 대한민국 르네상스는 펼쳐진다. 그만큼 고려대장경은 대한민국 르네상스의 원천(源泉)이라 할 만하다.
# 고려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만들었다. 첫 번째,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1011년(현종 2년)부터 77년에 걸쳐 이뤄졌다. 두 번째, 속장경(續藏經)은 초조대장경을 보완한 것으로 1092년(선종9년)부터 9년여에 걸쳐 대각국사 의천이 흥왕사에 설치한 교장도감을 통해 편찬했다. 세 번째,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은 1232년 몽골 침입 당시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1236년(고종23년)부터 16년에 걸쳐 다시 만든 것이다.
# 고려대장경은 성종 때 전래한 북송의 개보칙판(開寶勅板) 대장경과 국내에서 수집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처음 작업이 이뤄졌고 문종 때는 새로 전래한 거란의 대장경까지 제작에 참고했다. 그 규모는 몽골 침입 당시 소실된 초조대장경이 대략 6000여 경판 정도의 분량이었고 다시 만든 재조대장경은 경판 수만 모두 8만1258판에 달해 팔만대장경이라 불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많은 대장경의 경판 하나하나가 마치 한 사람이 쓰고 판 것처럼 일정하고 조화롭다는 점이다. 그래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 중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경판 전부가 소실된 초조대장경의 경우 일본 교토(京都) 난젠지(南禪寺)에 1715권, 쓰시마에 600여 권, 국내의 성암고서박물관, 호림박물관, 호암미술관 등에 약 300여 권 등 도합 2600여 권가량의 인경본이 현존한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일본 교토의 하나조노대학 국제선학연구소와 연구협정을 체결하고 난젠지에 소장된 초조대장경의 모든 인본(印本)을 정밀 촬영 중이며 2011년까지 이를 모두 디지털화할 계획이다. 아울러 이것의 인터넷 서비스를 위한 준비작업도 한창이다. 1000년 전 고려대장경은 디지털시대에도 이렇게 당당히 살아있다.
# 고려대장경의 경판 하나하나에는 우리 고유의 문화적 유전자가 담겨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은근과 끈기, 화평에의 의지다. 팔만대장경은 하루아침에 서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은근하고 끈기 있고 옹골차게 매진해야 가능했던 일이다. 그 고려대장경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도저한 저력을 상징한다. 외적의 침입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1000년 전 고려인들은 나무를 고르고 베고 말리고 켜서 경판을 만들고 그 위에 한 자 한 자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겼다. 그들이 새긴 것은 불경이었지만 거기 담긴 것은 은근과 끈기라는 민족의 저력이었고, 그들이 꿈꾼 것은 외적을 물리침과 화평이었지만 그들이 남긴 것은 천 년의 미래였다.
# 천 년을 버텨온 것은 단지 경판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의 놀라운 콘텐트 창출 능력이다. 우리는 천 년 전 조상 덕분에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받아 들고 있다. 고려대장경! 그것은 세계에 다시 없는 기록의 대장정이요 콘텐트의 보고(寶庫)다. 지금까지 고려대장경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주술적·종교적 의미에서만 해석돼 왔다. 그러나 대장경의 진정한 의미는 거기에 대한민국 르네상스를 펼쳐갈 콘텐트 창출 역량의 유전자가 경판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1000년 전의 고려대장경은 바로 그 콘텐트 창출 역량의 역사적 증거요 우리의 오래된 미래다.
# 대장경은 살아있다. 이제 우리는 대장경 편찬 1000년의 해를 앞두고 그 안에 담긴 우리의 도저한 문화적 유전자를 되살려 다시 1000년을 내다보는 옹골찬 미래를 그려야 마땅하지 않겠나.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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