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소설

2008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

시인 최주식 2010. 1. 16. 21:46

2008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

 

                                                    뱀

 

                                                                                                                                    윤보인

 

 

여자는 뱀을 키운다. 서른여섯 개의 검은 줄과 흰 줄이 몸통을 감싸고 있는 뱀이다. 그 줄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사선으로 나 있다. 뱃가죽에는 살이 토실하게 올라 있다. 몸통에서 이어지는 꼬리는 날렵하다. 표면을 투명한 비늘이 뒤덮고 있어 거죽이 더욱 단단해 보인다. 꼬리를 뒤흔들 때마다 힘이 느껴진다. 뱀의 이름은 밴디드 캘리포니아 킹 스네이크. 캘리포니아의 건조한 지역에 살던 녀석이라고 노인은 말했다.

얼려 놓았던 핑키를 꺼내어 녹이고 있다. 신문지에 검붉은 물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깃든다. 뱀은 미꾸라지나 귀뚜라미는 먹지 않는다. 녀석의 식성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먹이를 먹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미소를 거둔 여자는 마른 걸레 위에 핑키를 올려놓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물기를 없앤다. 손놀림은 매우 정성스럽다. 나른한 표정을 짓던 여자는 어항 속을 들여다본다.

아직 뱀은 보이지 않는다. 녀석은 또다시 톱밥 속에 제 몸을 숨겼을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웅크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핀셋으로 핑키를 집어 올려 어항 속에 넣는다. 핑키는 어미의 뱃속에 있는 태아를 닮았다. 핑키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혐오스러웠던지.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뱀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여자는 새끼 쥐를 핑키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톱밥 속에 숨어 있던 녀석이 먹이를 찾으러 나설 것이다. 여자는 손끝으로 어항을 두어 번 두들긴다. 그제야 녀석이 머리를 내민다. 먹이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스프링처럼 몸을 구부린다. 핑키의 엉덩이 부분을 물어버린 뒤, 한번에 집어삼킨다. 뱃가죽을 따라 꼬리가 흔들린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여자는 과자를 먹는다.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생긴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과자를 먹다가는 나처럼 살이 붙게 될 거야. 뉴스를 보니까, 과자 속에서 벌레 같은 것이 나왔다고 해. 징그러워.

거미 알의 목소리가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여자는 거미 알의 말투가 자신을 염려하고 있다기보다 자신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쯤에서 생각을 멈춘다.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을 빨면서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다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은 허공에 날아다니는 모기 때문이라고, 여자는 손을 뻗는다. 순간 높이 쌓아 놓았던 책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제야 신경질적으로 불을 켜고 쓰러진 책들을 쌓아 놓는다.

불이 켜지면 좁은 공간 속에 있는 물건들이 드러난다. 천장까지 높이 쌓아 올린 헌책들, 가장 높은 곳에는 철학책이나 경제 서적 같은 것들이, 그 아래로는 두꺼운 성서나 찬송가책도 보인다. 바닥에는 영어로 된 잡지들과 누렇게 바랜 시집들이 쌓여 있다. 그 사이사이 붉은색 표지의 현란한 음란 잡지들이 보인다.

이제, 그런 것들은 필요 없어.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면 어디든 옷을 벗은 여자들을 볼 수 있으니까. 심심할 때마다, 나는 그런 걸 자주 봐. 너도 그렇지? 솔직히 한번 말해봐.

거미 알은 수화기 저 너머로 목소리를 높여 가며 말했었다. 그래, 예전과 달라서 이런 책들을 사 가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 손님들이 힐끔거리며 잡지를 뒤적였을 뿐 직접 돈을 내고 사지는 않았다. 저 잡지를 판다면 얼마를 받게 될까. 천원? 아니 이천 원? 값을 너무 비싸게 받는다면 사람들은 언짢아하며 돌아갈 것이다. 이곳에 있는 대개의 책들은 이천 원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 할지라도 헌책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돌아서자마자 또다시 책들이 쓰러진다. 그러나 더 다가가지 않는다. 여자는 과자 부스러기가 남아 있는 엄지손가락을 돌려가며 길게 빨고 있을 뿐이다.

여자는 보름 전에 노인을 처음 보았다. 헌책방으로 향해 가던 길이었다. 노인은 쭈그리고 앉아 파충류와 전갈을 팔고 있었다. 여자는 망설임 없이 노인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노인은 어항 뚜껑을 열고 뱀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내 뱀의 꼬리가 쭈글쭈글한 손목을 휘감았다. 뱀의 머리는 두 개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는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한번 키워봐. 길들여지지 않는 사나운 놈이야.”

노인은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본 뒤 뱀을 들어올렸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노인은 여자의 손등을 툭 쳤다. 조심해, 물지도 모르니. 노인의 말투는 차갑게 들렸다. 어항 속에는 새끼 전갈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을 끈 것은 새끼 전갈이 아닌 검은 줄과 흰 줄이 몸통을 감싸고 있는 뱀이었다. 여자는 가격을 물었고 꿈틀거리는 녀석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그날 밤, 방 한구석에 처박아 둔 어항을 이용해 뱀 집을 만들었다. 어항의 밑바닥에 신문지를 겹쳐 깔고 그 위에 자갈과 톱밥을 얹어 놓았다. 꿈틀거리고 있던 뱀을 꺼내자 스프링처럼 감싸고돌았다.

머리가 두 개인 뱀을 봤다고? 그,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그보다 더 근사한 것을 본 적이 있어. 그런데 말이야. 네가 뱀을 키운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 언젠가 한번 찾아가보겠어. 그때는 숨김없이 보여줘야 해.

수화기 너머 거미 알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눈꺼풀은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쓰디쓴 커피를 마셔도 저녁 아홉 시만 되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졸린 것은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인터넷 게임을 해봐도, 과자를 먹어 봐도 잠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럴 때면, 이도 닦지 않은 채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벽까지 켜져 있는 도시의 불빛. 여자는 그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고 도시의 어둠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이들일까 궁금했다. 한번 눈을 감으면 쉽게 눈을 뜨지 못하는 습관을 가진 자신으로서는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그런 얘기들을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 역시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운 시선으로 바라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뱀을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집에 돌아오면 할 일들이 생겨나 무료하지 않았다. 적어도, 바닥에 누워 천정 모서리부터 벽까지 피어있는 곰팡이나 쉴 새 없이 스며드는 찬바람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어항 속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간혹 잠이 들 무렵이면 여자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에 휩싸였다. 바닥에 누워 있다가 자신의 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방.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장마 무렵에는 비가 새기도 하는 방. 만약 그렇게 된다면 건물 사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여자는 돌아누웠다. 그때마다, 거미 알은 전화를 걸었다. 어느 날은 말을 더듬기도 했고 어느 날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거미 알이 하는 말들을 믿지 않았다. 거미 알은 정말 수화기 저 너머에 있기나 한 것일까. 대화를 나누긴 했어도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된 거미 알. 그것은 게임을 할 때 사용하던 아이디였다.

새벽 두 시야. 잠이 오질 않아서 말이야…… 이 시간에 네가 자고 있다는 걸 알아. 그렇지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어. 내 말을 좀, 들어줘.

거미 알의 목소리는 한층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걸까. 여자는 자신의 가슴을 만지면서 돌아눕는다. 어쩌면 언덕 아래에 살고 있는 집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불이 켜져 있는 곳에 거미 알은 살고 있을지 모른다. 저 멀리 보이는 집이 아니라 매일 스쳐지나가는 후미진 골목에 붙어 있는 문 앞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모른다.

서늘한 여관방 같은 곳에서 너는 오래된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을 테지. 그럴 때면, 뱃살이 축 늘어진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거미 알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고, 인터넷 게임에 빠져 사는 거미 알. 간혹 너는 며칠동안 감지 않은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겠지. 여자는 두꺼운 이불로 자신을 감싸 안는다. 어항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자신의 허벅지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러니까요. 저…… 말이지요. 그것이 제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이거든요.”

남자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한다. 저런 표정은 짓지 않아도 되는 것을.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누군가 앞에서 웃어본 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던가. 그 때문인지 여자는 다시 한 번 남자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한다. 웃고 있는 것인지 찡그리고 있는 것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는 남자의 짝눈. 돌출된 치아. 좁은 이마를 반쯤 가린 머리카락은 얇은 빗으로 곱게 빗었는지 축 늘어져 있다. 언뜻 보기에 남자는 아픈 사람 같아 보인다. 창백해 보이는 얼굴 때문일까. 아니 그것은 깊은 외로움일지도.

남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 가만, 남자는 처음이 아니었지, 두 번째였던가. 다시 한 번 이곳에 찾아와 준다면 그때는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계속적으로 움직이는 남자의 손이 신경이 쓰인다.

“분명 제 실수였다는 거 압니다. 그렇지만, 혹시나 해서 와 본 거예요. 혹시나 해서…… 말이죠.”

남자는 반지를 찾고 있다. 아무 무늬도 없는 얇고 가느다란 반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헌책방 안에 있다 보면 책 속에서 뜻하지 않은 물건들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복권이나 빛이 바랜 사진, 간혹 구겨진 지폐나 편지 같은 것들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얼마 전, 남자는 자신의 책을 팔고 싶다며 이곳에 왔었다. 그가 돌아간 후, 책 속에서 반지를 발견했다. 얇은 금반지였다. 하필이면 금반지라니. 내용을 보고 싶지 않은 두꺼운 책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온 반지가 신경 쓰였다. 반지를 손에 쥐고 가까이 들여다보자 거기에는 R이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책 서문을 펼치자 얇은 펜으로 눌러쓴 남자의 글씨도 보였다. <란에게>라고 적힌 빛바랜 글씨. 란이 누굴까. 내내 생각했지만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혹시, 남자의 옛 애인이 아닐까.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여자는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란이란 사람에게 묘한 질투를 느꼈다.

남자는 반지를 찾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담. 반지를 다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여자에겐 없다.

미련이 많은 사람. 남자는 돌아가지 않는다. 오랫동안 서성이다가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뽑아서 뒤적거리고 있다. 먼지가 많이 쌓여 있는 바닥을 훑어보기도 한다. 얼마나 만난 사이였을까? 삼 년, 아니 오 년?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에, 흔한 반지를 잊지 못하고 자꾸 찾아오는 것일까. 그렇지만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서 있는 것이 나쁘지 않다. 가끔 마주치면 저렇게 눈웃음을 짓기도 하니까. 그래, 책을 펼치다가 이쪽을 바라봐준다면…… 그러나 남자는 끝내 보지 않는다. 들고 있던 책을 차갑게 덮어버리고 밖으로 나가 담배 한 개비를 뽑는다. 손놀림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 담배 연기는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헌책방 안으로 들어온다.

여자는 눈을 감고 일부러 기침을 한다.

“이런, 죄송합니다.”

남자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주춤거리다 먼 곳을 본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어쩐지 저 눈빛이 쓸쓸해 보인다. 어딜 보고 있는 것일까. 남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아무도 없는 빈 공터. 앙상한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다. 바닥에는 빈 페트병이 뒹굴고 있다. 다시 남자를 물끄러미 본다. 가느다랗고 섬세한 손가락.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다. 뭘 하는 사람일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까. 아니, 기타를 치는 사람일지도. 여자는 남자와는 대조되는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본다. 두툼한 손. 겨울만 되면 손등은 붉게 달아오른다.

“비싼 건 아닙니다.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이지요. 이니셜로 R이라고 적혀 있거든요. 그걸 새기고 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담배를 짓씹으며 애써 웃고 있지만 남자에게선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게다가 말끝엔 여운이 남아 있다. 무언가가 울컥하는지 숨을 크게 삼키다가 다시 여자를 보며 웃는다. 여자는 그를 향해 팔을 뻗으려다, 이내 거둔다.

스물다섯이 되도록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본 일이 있던가. 혹은 반지나 꽃다발 같은 것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자주 쓰인다 했지만, 그 말은 그 누구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가짜라 할지라도, 달콤한 말로 여자를 속인다 할지라도, 한번쯤은 그 다디단 말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사탕을 내밀며 유혹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여자의 외모가 형편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눈에 띄는 편은 아니지만 고만고만한 평범함으로 지금껏 살아왔다고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헌책방은 아버지로부터 인수받은 것이었다. 그 전에는 몇몇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중에는 낯선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가며 설문지를 작성하는 일도 있었다. 하루에 삼백 통 정도, 아니 사백 통. 대부분이 바쁘다거나 지금 일이 있어 받을 수 없다고 차갑게 끊어버렸지만, 간혹 전화 건 사람이 미안해질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 쪽에서는 여지없이 강한 말들을 쏟아내곤 했다. 한번만이라니요? 서툰 목소리로 여자가 그렇게 물을 때, 수화기 저편의 사람은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한다고 한번만 말해 주세요. 그리고 기나긴 침묵. 여자는 상대를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먼저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중년 남자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수음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의 그 남자나 지금의 자신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주 우스운 일이거나 위선적인 혹은 치정이라 할지라도 지금 그런 말을 듣고 싶다는 욕망이 여자를 짓누른다. 반지를 내밀면서 남자는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달콤한 말을 섞어가며, 상대를 설득했을 것이다. 여자는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몇 대의 담배를 피운 것일까. 그렇게 피면 몸에 해로울…… 그 순간, 남자가 헌책방 안으로 들어온다. 무릎을 굽힌 채 여자의 눈을 들여다본다.

“혹시…… 찾게 되면 연락을 주시겠어요?”

심한 짝눈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건네받는다.

이봐요, 실은 당신의 그 반지 말이에요. 여기 내 주머니 속에 있어요. 내 손에 꼭 맞던데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어깨를 좀 펴 봐요.

그러나 그 말들은 나오지 않는다. 여자는 침을 삼킨다.

남자는 먼 곳을 응시하다가 돌아서서 걷는다. 여자는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응시했던 그 공터 쪽으로 걸어간다. 비둘기들이 남자를 피해 날아간다. 남자는 서성거리다 빈 의자에 앉는다. 등을 구부린 채 주머니 속을 뒤적거린다. 담뱃갑을 꺼내어 그것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제야 여자는 종이를 본다. 저 사람이 찾고 있는 것은 지금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지. 그렇지만, 그것을 줄 수는 없지. 하루빨리 여자를 잊는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 그것은 나에게 좋은 일이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엉거주춤 문 앞에 서 있다가 어항을 들여다본다. 뱀은 꼬리를 구부렸다가 펼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움직임을 더 자세히 보려는 듯 여자는 등을 구부린다. 주머니 속에 있는 반지를 꺼내어 들여다본다. 그러다 반지를 깨물어본다. 차가운 기운이 혀끝으로 전해져 온다. 여자는 놀라 힐끔 뒤를 돌아본다. 거기엔 아무도 없다. 여자는 반지를 떨어뜨릴까봐 조심스럽게 손으로 감싼다. 한참 동안 매만지다가 반지를 어항 속에 집어넣는다.

헌책방에 뱀에 관한 책이 있었던가. 아니다. 그와 관련된 책들은 이곳에 없다. 그런 책들이 이곳에 있다 할지라도 뒤적거리며 찾아볼 의향이 있던가. 여자는 책을 읽는 것이 귀찮아서 던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여자는 먼지가 묻은 헌책들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오래된 냄새가 코끝을 타고 전해진다. 무심히 책을 넘기는 손길엔 어떤 애정도 배어 있지 않다. 책 속에 끼워져 있던 낙엽이 손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저 낙엽.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가 책 속에 넣었을 테지. 여자는 낙엽을 가만히 만져본다. 거기에는 여자가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추억이 서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낙엽을 얼굴 가까이에 대본다. 지금껏 누군가와 추억을 공유해본 적이 있었던가. 여자는 낙엽을 바깥으로 날려 보낸다.

뱀이 가느다란 모가지를 허공을 향해 치켜든다. 손으로 꿈틀거리는 뱃가죽을 만지면서 또 다른 손으로 톱밥 속에 있는 반지를 손에 쥐어 본다. 아,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 여자는 안심을 하며 반지를 뱀의 꼬리에 끼운다.

오히려 반지는 남자에게보다는 뱀과 함께 있을 때, 빛나는 것 같다. 이곳에는 남자의 흔적들이 너무 많다. 그의 책과, 소중히 여기던 반지와 그리고 연락처까지. 남자는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때는, 그에게 과자나 음료수, 사탕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는 담담한 목소리로 위로해 줄 것이다. 이봐요. 나도 계속해서 찾고 있어요. 어디 굴러 떨어진 것은 아닌지 바닥을 샅샅이 뒤져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 좀 먹어보겠어요? 아주 달고 맛있어요.

남자는 또다시 눈웃음을 지을까. 쑥스러워하다가, 옛 추억을 떠올리는 건 아닐지. 그의 눈동자는 글썽일지도.

여자는 뱀을 움켜잡는다. 뱀이 흐느끼듯이 머리를 뒤흔든다. 녀석이 길고 가느다란 혀를 내밀고 있다. 여자는 뱀의 입속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천천히 넣어본다. 손끝이 따스하다. 그곳은 단 한번도 남자의 손길이 닿아본 적이 없는 여자의 질 속처럼 깊어 보인다.

여자는 뱀을 내려놓은 후 구석진 곳으로 다가가 숨어 버린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책 사이로 보이는 틈새를 눈으로 흘낏거리면서, 자신의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어느 새 그곳은 젖어 있다. 조금 전에 만졌던 뱀의 입 속보다도 따뜻하다. 여자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듯 웃음이 감돈다. 그러다 누군가가 볼까봐 흠칫 놀라며 손을 빼버린다.

헌책방 안으로 미세한 먼지들이 피어오른다. 여자는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손끝을 바지에 두어 번 문지른다. 그 순간 투명했던 뱀의 눈동자가 흐릿해져 있음을 느낀다. 몸통을 두르고 있던 검은 줄무늬 역시 회색빛으로 변해 있다. 여자는 고개를 내밀며 어항을 들여다본다. 처음 녀석을 보았을 때 얼마나 근사한 색을 지니고 있었던가. 그 빛깔은 얼마나 강렬하고 아름다웠던가. 게다가, 헌책방에 들르는 사람들은 오래된 책보다는 어항 속에 들어있는 것을 향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가. 누군가는 만져보고 싶다고 했고 자신들도 한번쯤 키워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사나움을 버리고 이렇게 순하게 변한 것은 녀석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혹시 나쁜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여자는 두려움을 느끼며 핑키를 던져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다. 여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움켜잡는다.

왜 이렇게 변한 것인지 노인은 알고 있지 않을까. 여자는 신발을 구겨 신고 노인이 있는 곳으로 향해간다.

“허물을 벗으려는 게야.”

주름진 손으로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노인은 말한다. 여자는 그제야 그것이 탈피를 하기 전에 나타나는 증상임을 알아차린다. 탈피를 하기 전 뱀의 눈은 시력을 잃은 듯 보인다고 했다. 얼마 후, 껍질을 벗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지고 길이도 자라나게 될 것이라고. 녀석뿐만 아니라 다 거쳐 가는 증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에야 여자는 안도감이 든다.

가늘고 흰 뼈마디를 가진 노인은 분무기를 쥐고 어항 속에 들어 있는 전갈을 향해 물을 뿌렸다. 머리가 두 개였던 뱀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여자는 노인의 손에 돋아난 실핏줄을 바라보다가 어항을 끌어안는다. 어항 속의 톱밥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출렁인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기름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남자가 가까이 다가온다. 아, 이렇게 빨리 남자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여자의 눈빛이 복잡해진다. 남자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손을 들어올린다.

“아, 뱀이군요. 근사한데요.”

어항 속을 들여다보자마자 남자의 눈빛이 생기 있게 변한다. 여자는 주머니 속을 뒤적여 그 속에 있던 사탕을 한 개 꺼내어 남자에게 건네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찾아온다면, 웃어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먼저 다정하게 말을 걸어보리라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여전히 호주머니만 뒤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남자는 사탕 껍질을 벗겨내면서 웃는다.

“이렇게 멋진 놈은…… 정말, 처음이에요.”

남자의 눈이 투명하게 빛난다. 조금만 더, 가까운 곳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면. 여자는 어항 속에 들어있던 뱀을 꺼내어 남자의 손에 올려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아니, 손이 아니라 저토록 연약해 보이는 어깨와 목에 둘러주고 싶다고,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때에는 불편하고 거북했던 마음이 남자 앞에서는 사라진다. 남자 곁에서 다디단 향내가 나는 듯하다. 여자는 남자의 검은 머리통을 올려다본다. 오늘도 머리를 감지 않은 것일까. 그런데 설마 어항 속에 있는 반지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여자는 불안한 듯 어항을 가로막는다.

남자가 다가온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기를…… 여자는 치아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선홍빛 혀를 쳐다본다. 그것은 뱀의 혀보다도 부드러워 보인다. 여자는 침을 삼킨다. 남자는 더 가까이 오려다가 책을 뽑아든다.

“아, 이 책을 여기서 발견하네요. 이거 구하기 힘든 건데.”

여자는 막막한 눈길로 남자의 검은 머리통을 올려다본다. 구부러진 저 등을 오랫동안 끌어안고 싶다고, 그리하여 반지 따위에 정신을 쏟지 않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책을 만지고 있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손가락을 다시 빤다. 남자는 등을 돌린 채 헌책들을 뒤적거리고 있다. 여자는 두 손을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의 가슴을 매만진다. 자신 이외에는 한 번도 누군가가 만져본 적이 없는 가슴을. 여자의 속살이 얼마나 희디흰지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한지 남자에게 한번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아차, 이것 좀 보세요.”

남자는 즐겁다는 듯이 여자의 눈을 응시한다. 빳빳하게 펼쳐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손끝에서 흔들린다. 남자는 운이 좋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이 한 일이라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뱀을 키우기 이전에 헌책방 안에 있다가 잠이 쏟아지곤 할 때면 책 사이에 지폐를 몇 장 끼워 넣곤 했다. 그것은 무료함을 떨쳐버리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니 여자 또한 기분이 좋아진다. 다가올 미래의 어느 날, 그러한 행동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구겨진 스커트 자락을 매만지다가 다시 남자를 바라보지만 그는 더 이상 이쪽을 보지 않는다. 여자는 고개를 돌린 후 천천히 어항을 살핀다.

이상한 일이야. 잠이 오질 않아. 그래서 말인데 나도 뭔가를 좀 키워볼까 해. 방안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게 점점 지겨워져. 어떤 것을 키우는 게 좋을지 나에게 좀 알려줘.

새벽마다 걸려오는 거미 알의 전화. 여자는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잠결에 배, 뱀이라고 중얼거린다. 뱀이라고? 거미 알이 그렇게 물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눈을 감은 채 거미 알이 뱀의 꼬리를 매만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만약 한 번 더 자신에게 묻는다면 그때는 어떤 뱀을 추천해줄 수 있을까. 그린 스네이크. 그래, 그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예민하고 까다로워 환경이 달라지면 음식을 거부한다고 했다. 처음 키우는 사람들 앞에서는 대개 거식증을 보이고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된다고 했다.

졸음이 점점 쏟아진다. 여자는 침을 삼키며 두꺼운 이불 속으로 숨는다. 전화벨이 울려도 일어서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전화벨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울린다. 텅, 텅, 차가운 빈방을 조금씩 흔들어 놓는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내린 뒤 전화기의 코드 선을 뽑아버린다. 숨 막히는 저 전화벨 소리. 잠깐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얘기를 좀 들어달라고 할지라도, 졸음 앞에서 전화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거미 알은 정말 저 멀리에 있기나 한 것일까.

날이 밝을 때까지 여자는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처럼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일어서다가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평소보다 부은 얼굴을 본다. 손과 발도 퉁퉁 부어 있다. 여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긴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그제야 열한 시간 이상을 잠으로 보냈음을 깨닫는다. 뽑았던 전화선의 코드를 다시 꽂은 후 어항이 있는 쪽으로 바짝 다가간다.

네가 있는 곳이 청계천 어디라고 했지. 외출하게 되면, 한번 찾아가보겠어. 그때는 꼭 너의 그, 그 녀석을 좀 보여줘.

거미 알의 목소리. 그래, 한번쯤은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자는 눈을 비빈 후 어항을 조심스럽게 매만진다. 그런데…… 아무리 뒤적거려도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숨어 버린 것일까.

순간 여자의 표정이 차갑게 변한다. 어항을 뒤집어 그 속에 있던 톱밥들을 쏟는다. 구석에 놓아두었던 물그릇도 순식간에 쏟아진다. 여자의 손가락이 조금씩 떨린다. 무엇이 만져지는 것 같다. 여자는 느릿한 손놀림으로 그것을 들어올린다. 수백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허물이다. 껍질은 얇고 가늘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하다. 스타킹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언젠가 노인이 말했던 것이 이것이었던가.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구의 틈새를 급한 눈으로 살피기 시작한다. 손으로 바닥을 쓸어 본다. 옷장을 열었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구석구석을 살핀다. 바닥에는 과자부스러기와 머리카락이 남아 있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뱀이 도망쳤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자는 막막한 눈길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언젠가 녀석이 이 손바닥 위를 기어갔었지. 얼마나 간지러웠는지. 여자는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두툼한 자신의 손을 매만진다. 로션을 바르지 않은 손등. 트고 갈라져 있다. 여자의 눈빛이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불안하게 흔들린다.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흐른다. 헌책방에 가야 할 시간임에도 여자는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허물을 두 손에 꼭 쥐고 변기 위에 앉아 있을 뿐이다. 한 평이 채 되지 않는 좁은 화장실. 갑갑함도 느끼지 못하고 그곳에 있다. 창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뱀이 남기고 간 허물 끝에 머물러 있다.

뱀은 전보다 더 자라났을 것이다. 뱀이 삼켜버린 그 얇은 반지가 떠오른다. 반지를 찾기 위해 애쓰던 남자, 그는 오늘도 헌책방 앞에서 서성거릴 테지. 당신이 애타게 찾던 반지는 뱀이 삼켜버렸다고 말해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남자는 당황하겠지. 그것이 아니라면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 체념을 할지도 모른다. 남자가 만약 기운 없이 돌아선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여자는 흐르는 땀을 닦아낸다.

천천히 바지와 팬티를 내린다. 오줌 줄기가 변기 속으로 섞여 들어갈 때쯤 허물을 서서히 찢기 시작한다. 냉동실에 핑키는 몇 마리나 남아 있을까. 다섯 마리, 아니 여섯 마리. 그것은 어쩌면, 내일이면 쓰레기통에 버려질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쓸데없는 희망을 품는 일에는 이력이 나 있지 않았던가.

여자는 바닥에 놓인 어항을 노려보다가 휘청거리며 일어선다. 아무렇게나 뒤섞인 톱밥들. 두 손으로 어항을 들어올린다. 그것을 비스듬히 기울여 변기 속으로 천천히 쏟아낸다. 들고 있던 허물마저 변기 속에 떨어뜨린다. 톱밥과 허물이 뒤섞여 출렁인다.

요즘엔 왜 게임을 하지 않지? 나 말이야. 아이디를 바꿨어. 이제는 거미 알이 아니야. 궁금하면 들어와서 확인해봐. 그리고 말이야. 지난번에 네가 말한 그, 그 녀석 이름이 뭐라고 했지?

또다시 다가왔다 사라지는 거미 알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것 같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그때 방안에서 전화벨이 다급하게 울린다. 아직 밤이 오려면 멀었는데 거미 알, 또 너구나…… 손을 뻗으며 전화벨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려다 돌아선다.

여자는 수도꼭지가 있는 쪽으로 엉거주춤 다가간다. 물이 쏟아지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 다리를 한껏 벌린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몸 속 깊은 곳 거뭇한 부분을 들여다본다. 아, 동굴처럼 깊고도 짙은 어둠이다. 여자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세심한 손놀림으로 매만져 본다. 좁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던 빛이 두 눈가에서 머문다. 여자는 질 속으로 서서히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고개를 숙이자, 거기에 뱀 한마리가 나른한 듯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뱀은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있다. 여기에 숨어 있었다니. 여자는 뱀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본다. 조금만 더 손가락이 닿는다면 꼬리가 잡힐 것이다. 아니, 토실하게 살이 오른 뱃가죽이 먼저 잡힐 것이다. 무엇이 먼저 잡히든지 어서, 저 어두운 곳에서 빼내고 싶다고, 더는 축축한 곳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여자는 불안한 듯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나 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이 닿을 수 없는 깊숙한 곳으로 멀리 달아나 버린다.